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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유승대] 말하자면 너를 2

CHA 2025. 10. 16. 01:21

 

- 가비지타임 2차창작

- 재유X승대

-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2. 나를 연애하게 하라

 

재유는 서울이나 부산이나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교대에 합격한 기쁨이 충분히 가신 후 부모님이 걱정할 때, 신경 쓰지 말라며 의젓해진 아들 행세를 했다. 김해에서 부산으로 이사할 때도 잘 적응했으며, 이미 서울 생활을 해본 승대가 숙소 룸메이트니까 여차하면 이것저것 물어보겠다고. 낯을 가리는 재유가 친구와 나란히 학교에 입학하고, 같은 방까지 받다니 운이 좋았다.

입소일이 되어 아직은 학생이 없는 교정을 나란히 걸으니 그제야 대학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재유가 정문 안쪽의 지도에서 머무르자 승대가 길을 이미 아는 것처럼 길잡이를 자처했는데 결국 다른 과 건물로 당도해서 숙소 가는 길에 이십 분은 헤매야 했다.

숙소 방은 그렇게 크지 않아도 필요한 가구 두 쌍이 모두 가지런히 놓일 정도의 규모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 벽에는 수납장과 책상, 그리고 그 사이 욕실 문이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침대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맞은편에는 창문을 가린 얇은 커튼이 오전 햇살을 일렁이며 비추고 있었다.

“내가 창가 자리.”

승대가 민첩하게도 가방을 창가 쪽 침대로 던졌다. 해가 들어 밝고 환기도 편해 좋기야 하겠지만 재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책상에 가방을 올리고 수납장과 욕실을 차근차근 확인했다.

그때 승대가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농구부 숙소라고 맞춤 제작한 길이의 침대와 매트리스였던 것이다. 가로 길이는 고작 슈퍼 싱글 정도였지만, 세로 길이는 승대를 충분히 품고도 남았다. 대각선이 아닌 수직으로 누운 승대가 발끝을 움직여보고 머리 위를 더듬거렸다. 재유도 자신의 침대에 따라 누웠지만 아무래도 딱히 큰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머리맡에 뭐 던져놓기 좋겠다, 정도. 승대가 유난스레 기뻐하니 웃기기는 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생활용품과 운동복, 가벼운 취미 물품 정도가 전부라 세 박스로 끝나는데, 막상 학기가 시작하자 가열찬 농구부 훈련과 정신없는 OT가 이어져 도무지 짐이 정리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승대가 이번 주말까지는 무조건 끝장을 내자고 선언한 참이었다.

비누와 칫솔, 면도기만 두 개씩 놓여있던 휑한 욕실에 다양한 물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재유는 거울장 한 칸에 수건과 스킨, 로션만 깔끔히 정리해 두었고, 승대는 클렌저와 토너, 로션, 수분 크림, 선크림, 데오드란트, 왁스와 스프레이……. 아직 수건은 한 장도 들어가지 못했다. 또 벽 선반에는 재유가 브랜드 명도 제대로 읽지 못할 샴푸와 트리트먼트, 바디워시, 스크럽이 놓였다.

“이게 다 뭐고.”

재유의 얼빠진 물음으로도 단번에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승대가 대꾸했다.

“니가 누나랑 살아봐라.”

“누나 핑계는. 니 원래 깔롱지긴다이가.”

비겁하게도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재유가 승대의 물건을 구경하며 중얼거렸다.

“내도 데오 쓰는 게 좋을까.”

“재유 니는 자주 잘 씻으니까 괜찮아.”

“임승대, 안 씻으려고 쓰는 건 아이제.”

“뒤질래?”

재유의 실없는 웃음에 승대가 주먹으로 치는 시늉을 했다.

“필요하면 내 거 써라.”

죽겠냐고 을러놓고, 곧바로 자기 물건을 흔쾌히 빌려주다니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싶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데오드란트에는 향이 없었다.

재유의 책상에는 농구 서적이나 노트, CDP와 음반들이 놓였고 승대의 책상에는 조그만 피어싱 보관함과 빗, 파스, 헤어 밴드 같은 잡동사니, 그리고 향수 하나가 놓였다. 재유는 언젠가 승대가 향수를 뿌리고 나온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에 맡은 냄새가 이 향수인가. 하나밖에 없네. 그는 무심코 향수를 손에 들어보았다.

“왜, 그것도 빌려 쓰게?” 승대가 핀잔을 주듯 물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면 농담이기는 했다.

“아니…….”

뭔가 변명해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재유는 그러지 못했다. 머뭇거리며 도로 내려놓을 뿐이었다.

“살 거면 어울리는 거 추천해 줘?”

“괜찮다.”

“잼민이가 사춘기구만.”

그렇게 놀리고 그는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장에 운동복과 평상복을 채우기 시작했다. 커다란 옷들을 잘도 각에 맞춰 예쁘게 개어 넣었다. 옷도 재유에 비해 훨씬 많았다. 저건 빌려 입을 수도 없겠다고 생각하며 재유는 소리 없이 웃었다.

재유가 농구부, 학과 동기며 선배의 얼굴과 이름을 간신히 외워갈 무렵 승대는 이미 훈련을 쉬는 날마다 붙임성 좋게 모임에 놀러 나갔다. 가끔은 재유를 끌고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부르는 사람이 많은 승대 옆에 멀뚱히 앉아 다른 운동부 사람들을 소개받곤 했다. 연락처도 여러 번 교환했지만 실제로 연락까지 이어진 적은 아직 없었다. 그런데도 모두가 재유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친한 척을 했다. 승대가 자주 얘기하는 룸메를 드디어 만났다는 것이다.

승대는 재유와의 대화에서 여전히 사투리를 쓰면서도 다른 동기나 선배들 앞이면 매끄러운 서울말을 썼다. 서울 지하철도 꽤 잘 알았고, 장도고가 가까운 동네면 아는 가게도 많았다. 고등학생 때 농구에만 열중하진 않았을 거라 짐작이 갔다. 그래서 대체로 어엿한 대학생처럼 보였고, 가끔은 뺀질거리는 듯 보이기도 했다. 서울 사람처럼 말하는 승대를 보면 그가 지상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마주친 날의, 말투부터 어색해 낯설고 섭섭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재유는 술자리에 따라 나가는 횟수를 줄였다. 내향적인 친구를 걱정해 잘 적응하도록 도우려는 그 마음은 기뻤으나, 농구에 좀 더 집중하고 싶기도 했고 술도 잘 안 받았다. 그러나 승대가 여러 사람을 접하고 다니는 것만은 좋게 보았다.

재유는 종종 그에게 귀가 시간을 물었다. 오늘처럼 늦어질 때는 자정을 지나지 않도록 한 번 일러두는 편이 좋았다. 숙소 통금을 십 분 남겨두고 문이 철커덕 열렸다.

“승대 왔나.”

재유가 헤드셋 한쪽을 살짝 들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엉.”

뭐가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취한 정도가 1에서 10까지 있다면 6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 증거로 승대는 신발을 벗자마자 재유의 침대 끄트머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침대가 길어서 다행이었다. 재유는 잔소리하는 대신 다리를 조금 접어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래봐야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쳐 상체만 간신히 누일 수 있는 덩치였다. 소주 냄새가 슬쩍 풍겼다.

“진재유. 뭐 듣냐.”

“어?”

재유는 승대가 말을 걸자 헤드셋을 벗어 목에 걸쳤다.

“같이 듣자.”

승대의 웃는 입이 좀 더 벌어지더니 점퍼 안주머니에서 동그랗고 묵직한 회색 덩어리를 끄집어내 보였다. 다소 애매한 모양새기는 해도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인 것 같았다. 재유는 스피커를 받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샀나.”

“당근 했지. 너 해라.”

승대는 다시 털썩 눕더니 빨리 페어링하라며 손짓으로 재촉했다. 사용법은 꽤 직관적이라 스피커의 블루투스 버튼을 누르니 휴대전화에서 연결할 수 있는 기기가 표시되었다.

손 위의 동그란 기계에서 모리세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의 무드는 더 스미스였으므로 아티스트 탭에서 무작위 재생을 해두었다. 몇십 초 정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승대가 말했다.

“뭔 노래야, 생각보다 감성적이네. 너 메탈 듣는 거 아니었냐?”

“……메탈이 아니라 록이고, 나는 세부 장르 안 가려서…….”

“좋네.”

말을 끊는 딱 두 글자의 평가였지만 재유는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쑥스러워했다. 그래서 승대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가져가 플레이리스트 구경하는 것도 내버려두었다. 최신순으로 나열하면 승대가 듣던 노래를 몰래 추가한 내역이 보이겠지만 다행히도 몇천 곡의 제목 순 리스트에서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을 것이었다.

I would go out tonight but I haven't got a stitch to wear

This man said, It's gruesome that someone so handsome should care……

“디스 차밍 맨. 더 스미스 노래다. 비교적 잔잔하긴 한데 이런 것도 가끔 들으면 좋더라.”

“흐음.”

재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잠시 바라보던 승대가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좀 더 편하게 뉘었다. 스피커라는 새 식구의 등장에 들떠있던 공기가 조금씩 차분해졌다. 휴대전화는 이불 사이로 스르륵 떨어졌고, 원래도 졸려 보이는 눈은 아주 느리게 감기기 시작했다.

외출해서 피곤했는 모양이네. 재유는 그가 빠르게 잠에 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잠들면 목이나 허리가 불편해질 거라고 걱정하면서도 깨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잠시 함께 지낸 지상 숙소 시절, 승대는 잘 때 깨우면 항상 신경질을 냈다. 재유는 좀 더 차분한 곡을 목록에 엮어 넣었다.

승대의 느린 숨소리가 공기를 울리자 재유도 다리를 한쪽 구석으로 빼며 모로 누웠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면 내일 내내 뻐근할 거래도……

“아, 씨바. 지각하겠다.”

“헉….”

승대의 우렁찬 욕설에 재유가 잠에서 깨며 숨을 들이켰다. 충전기에 꽂지도, 노래를 끄지도 않은 채 잠들어 재유의 휴대전화가 죽어있었다. 알람이 울리지 않아서 그대로 숙면할 뻔한 아침에, 잠귀가 밝은 승대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복도의 기척을 듣고 번쩍 몸을 일으킨 것이다.

준비랄 것도 없이 승대가 눈에 보이는 저지를 붙잡아 들고 문을 나섰다. 승대는 어제 차림 그대로, 재유는 잠옷 차림 그대로였다. 눈곱도 못 뗀 상황이었지만 1학년이 아침 연습에 지각하느니 입냄새 풍기며 운동하는 게 훨씬 나았다. 그를 따라나서기 전 두리번거리던 재유가 외쳤다.

“야, 그거 내 저지다.”

“그러네.”

그렇게 말하고는 돌려주는 기색이 없었다. 재유가 체격이 조금 클 것을 기대하며 넉넉하게 산 사이즈의 저지였는데도, 승대가 입자 여자들이 입는 볼레로 같은 비주얼이 되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넣는 여유를 보이고 체육관으로 뛰어갔다.

점마가…. 하아. 재유는 한숨을 쉬고 포댓자루처럼 될 것이 뻔해서 입지도 못할 승대의 저지를 챙겼다. 다리가 길어 한달음에 복도 끝으로 사라진 그를 쫓아 달렸다. 아마 계속 이렇게 실수하겠지만, 그와 함께 지내니 지각도 하지 않고 잘 풀릴 거라 예감하면서.

승대는 꽤 예민하고 유치한 성격인데 사교를 할 때는 능구렁이처럼 속을 잘도 숨기고 살갑게 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친구가 꽤 많았다는 얘기다. 이따금 재유에게만 솔직하게 친구들에 대해 이 녀석은 그래서 싫고, 저 녀석은 어때서 짜증 나고 투덜거리는 것을 보면 울타리가 확실히 깊고 좁은 편이었다.

과대 무리와 술을 마시러 갔으니 털어놓을 불만이 또 하나 생기지 않을까 싶은 날이었다. 재유가 잘 준비를 마치고 나니 숙소 통금 시간이 아슬하게 걸려 있어 슬슬 걱정되던 차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임승대, 세 글자가 찍혀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복도에서 들릴세라 조심스레 물었다.

“임승대. 와 안 오는데.”

―어, 재유야. 지금 숙소니?

들려오는 것은 승대가 아니라 같은 스포츠과학과 선배 혜리의 나긋한 음성이었다.

“아, 예. 누나. 혹시 승대 꼴았나요.”

―그 정도는 아닌데, 숙소 들어가기 싫다고 고집부려. 이거 그냥 내버려둬도 돼?

“냅두시면 제가 데리러 갈게요. 문자로 위치 한 번만 찍어주세요.”

학교에서 십 분 정도 나가야 있는 번화가였다. 농구부 선배들이 알고 혼낼까 봐 기척을 죽이고 복도를 벗어났다. 그리고 숙소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빠르게 길을 내달렸다.

‘술 마시고 통금 늦으면 코치한테 깨질 텐데.’

앱에서는 주소로만 읽히던 곳에 도착하고 보니 인형뽑기 가게였다. 어둑한 호프집, 이자카야 조명 사이에서 파스텔 톤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조금 두리번거렸지만 역시 커다란 실루엣이 있는 곳은 인형뽑기 가게였다. 승대는 다행히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뽑기 기계와 혼자 씨름하고 있었다. 덩치도 크고 성질도 있는 녀석이니 조금 취했다고 해서 누가 곁을 지켜줄 필요는 없었다. 아마 조금 창피하기도 했을 것이다.

재유는 가게로 들어서서 무릎으로 승대의 허벅지를 툭 차며 인사했다. 술 냄새는 별로 풍기지 않았다. 딱히 만취한 기색도 아니었다.

“인마 뭐 하노.”

“아, 재유 왔나.”

승대는 허리를 한참 수그리고 인형뽑기 기계에 천 원짜리를 집어넣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다른 기계들과 달리 꽤 커다란 인형들이 들어있어 무식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놈이었고, 기계와 승대 주변의 사물들은 미니어처처럼 보여 꽤 우스꽝스러웠다.

“이것 좀 뽑아줘라.”

승대가 재유의 팔을 잡아끌어 손을 짚은 지점에서는 승대 머리만 한 햄스터 인형이 느긋하게 웃고 있었다. 한숨 쉴 틈도 없이 기계의 카운트가 시작되어서 재유는 빠르게 조작 핸들을 잡았다.

얼떨결에 시작한 첫 기회가 햄스터 등을 살포시 긁어주며 날아갔음에도 승대는 천 원짜리를 망설이지 않고 또 넣었다. 재유에게 핸들을 잡게 한 주제에 옆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이 많았다. 재유는 부담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꼈다. 출구에 햄스터의 작은 발을 걸치게 했을 때는 둘 다 탄식과 감탄을 함께 터뜨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중딩 때 생각나네.” 승대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칠칠맞게 새어 나왔다.

“아……. 니 중딩 때도 그 포켓몬인가 뽑겠다고 용돈 다 날린 적 있었다이가. 하하.”

“커다란 꼬부기. 그것도 니가 뽑아줬잖아.”

“한 방에.”

“맞지. 그거 아직도 우리 집에 있다.”

승대는 집중하는 재유를 건들지 않고 아크릴 창에 살짝 어깨를 기대었다. 재유는 뽑기 기계의 화사한 조명을 마주한 채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었다.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고 감으로 결정지은 위치가 딱 맞아떨어졌다. 고리가 햄스터의 반대편 다리를 들며 출구로 다이빙시켰다.

별것도 아닌 일로 두 사람은 환호성을 질렀다. 승대는 인형을 꺼내자마자 괘씸하다며 퍽, 퍽 주먹으로 두들기고는 한쪽 팔로 세게 끌어안았다. 재유는 한숨 섞인 구박을 가장하며 놀렸다.

“덩치도 산만한 게 뭔 인형을 이래 좋아하노.”

“귀엽잖아.”

이제 가자. 승대는 후련한 기색으로 뽑기 가게를 나섰다. 재유는 광활한 등짝과, 옆구리에서 삐져나온 햄스터 꼬리만 보고 걸었다. 어둠이 내린 거리는 꽤 조용했고, 잘 시간이 지나 하품이 끊이질 않았다. 승대가 오늘 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주절거리며 그의 잠을 깨웠다.

며칠 후, 오후까지 시간 때울 요량으로 찾은 과 건물 휴게실에서 혜리를 마주치자 그가 대뜸 물어왔다.

“그날 승대 잘 주워갔어?”

“네, 감사해요. 근데 통금은 늦었어요.”

“아이고……. 내버려뒀으면 승대만 혼났을 텐데. 다음에는 걍 버릴게.” 혜리가 안타까워하며 웃었다.

“그래도 좀 걱정돼가. 다혈질이 술 먹고 사고 칠까 봐요.”

재유는 농담 아닌 농담으로 받아치며 따라 웃었다. 혜리는 배드민턴 선수인데, 3학년 과대로 스포츠과학과 학생들과는 두루두루 알고 지냈다. 승대는 유독 그를 꽤 친밀하게 여겼다. 누나가 있어서인지 연상의 여자 상대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재유도 운동하는 사람치고 성격이 부드러운 혜리가 다른 선배들보다 편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학교 나가서 점심 먹으려는데, 같이 갈래?”라고 물어올 때 흔쾌히 따를 정도로.

교정을 나서는데 동기인 도현을 마주쳤다. 그는 배구부인데 지나치게 사교성이 좋아서 재유에게까지 그의 마수가 닿은 느낌으로 알고 지내게 되었다. 재유는 말주변이 좋고 호의적인 두 사람 사이에 껴서 기를 빨리며 가게까지 걸었다. 중고등학생 때까지 딱히 먹을 일 없던 일식 가정식이었는데, 튀김이 좀 많은 걸 빼면 꽤 괜찮았다. 먹은 건 알아서 결제하려 했더니 혜리가 밥을 사주어서 운동부답게 90도로 꾸벅 인사했다.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먼저 자리를 뜨려고 눈치를 보는데, 두 사람은 잠깐 들리자며 재유를 올리브영에 끌고 갔다. 세수하고 바를 로션도 다이소에서 사는 재유는 굳은 채로 그들 뒤를 따라다닐 뿐이었다.

긴장이 풀린 것은 의외의 코너였는데, 향수가 늘어선 선반에서 익숙한 병이 시선을 끌었다. 다른 브랜드의 병과 비교하니 심플하고 커서 남성용인가 싶었다. 재유는 뚜껑을 열고 입구에 코를 대보았다가 옆에 비치된 시향지에 조심스레 한 번 뿌렸다. 기억하는 것과 꽤 다른 향이었다. 이렇게 맡으니 별로 좋지도 않았다.

“사려고?” 혜리가 시향지에 머무른 향을 맡아보더니 물었다.

“아, 승대가 맨날 쓰는 향수라서요.”

“걔가? 향수 냄새 맡은 적 없는데. 하긴, 멋 좀 부리는 것 같더라.”

“높아서 못 맡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주먹으로 어깨를 얻어맞으며 웃었지만, 재유는 조금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무 의식하고 있는 건가. 친구가 자주 쓰는 향수를 눈여겨 본 게 평범하지는 않다고 느껴졌다. 뭐랄까 그냥, 룸메니까 알고 있는 것뿐인데.

재유가 시향지를 달랑 들고 생각에 잠기려던 그때, 도현이 폭탄 같은 발언을 던졌다.

“임승대 얘기 나와서 말인데, 혹시 걔 게이야?”

재유와 혜리의 입이 느리게 조금 벌어졌다.

“……승대가?”

재유가 되묻자 도현이 끄덕였다.

“게이 친구 한 명 있는데 잭디에서 키 이미터 넘는 남자랑 매칭된 적 있다고 그러더라. 우리 학교 농구부에도 그 정도는 걔 말고 없지 않냐?”

“잭디가 뭔데?”

“야,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혜리 누나가 두 사람의 말을 끊었다. 재유의 물음은 묻혔다. 하지만 자세히 알면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도현이 뻔뻔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요,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리고 원래 떠벌리면 안 돼.”

혜리가 쏘아붙였다. 승대의 룸메인 재유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뭔 말을 못 해요. 도현이 투덜거리면서도 입의 지퍼를 잠갔다.

그와 함께 재유도 멍하니 벌어진 채였던 입을 꾹 다물었다. 매칭됐다는 건 데이팅 앱 같은 데서 서로 맘에 들어서 만났다는 건가. 그런 데 관심이 있어 봤어야 알지.

생각만큼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승대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은연중에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재유는 언제까지고 승대를 존중하고 싶었는데, 그가 일부러 알리지 않은 영역에 강제로 노출된 느낌이었다. 그가 직접 말하는 게 아니라면 알고 싶지 않았다. 재유는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후로 재유는 머릿속의 무거운 덩어리를 계속 굴리면서도 절대 언급하지 말자고, 난처할 일을 만들지 말자고 의식하여 입을 꾹 막고 있었다. 하지만 주말 오전,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브랜드 룩북에 나오는 모델처럼 차려입고 신경 써서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승대를 보니 저도 모르게 입이 터지고 말았다.

“애들이, 니 게이냐고 묻더라.”

“뭐? 나?”

승대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재유를 잠깐 돌아보더니, 보이지 않는 뒷머리도 깨끗하게 빗어넘겨 머릿결을 잡았다. 너무 태연한 반응에 오히려 물어본 재유만 조금 멋쩍어졌다. 승대가 이번에는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누가 그래?”

“……그냥, 소문 같은 게 돌아서.”

자세히 말하면 말이 길어지고, 추궁하는 분위기가 될 것 같아 재유는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실제로 근거 없고 위험한 소문 따위를 본인에게 들이미는 모양새이기도 했다.

“남자한테 고백받은 적은 있는데.”

“맞나…….”

“내가 좀 잘생겨야 말이지.”

승대는 부정도 않고 유쾌하게 돌아서며 턱을 치켜들었다. 재유는 손에 땀을 쥔 와중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뭐래, 끄지라.”

재유가 옆에 있던 베개를 정확히 그의 가슴팍으로 던졌지만, 베개는 곧바로 붙잡혀 도로 날아왔다. “아!” 재유가 꽤 세게 맞은 얼굴을 털어내고 고개를 들자 이미 승대는 휴대전화와 지갑을 챙겨 방을 나서고 없었다. 그날도 누구와 놀러 나가는지는 알지 못했다.

엄한 감독의 높은 기대를 담은 훈련량에 늘 죽겠다, 토하겠다 달고 사는 1학년들이었지만 이번 주말 훈련은 정도가 심했다. 막 더워지기 시작해서 몸도 정신도 적응을 못 하고 혼란스러워하는데 아침, 낮과 밤으로 세 타임을 진행하려니 점심과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도로 뱉지나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도 수준이 달라짐을 실감할 수 있었지만 새삼스레, 대학교란 앞으로도 이 레벨이니 연습에 내 몸을 맞추는 수밖에 없다는 잔인한 가르침의 날이었다.

드리블 연습을 하던 재유의 무릎이 꺾인 것은 일요일 저녁 훈련이었다. 피로가 회복되지 않았는데 고강도의 연습이 이어지니 종아리에 갑작스레 통증이 올라온 것이다. 코치와 선배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옆 라인에서 러버콘을 통과하던 승대도 성급하게 발을 멈추었다.

“스트레칭 대충 했어?” 코치가 재유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런가……. 아, 아픈데요. 만지지 마세요.”

“봐야 알지.”

종아리를 이리저리 살피던 코치가 재유의 비명을 무시하고 발을 잡아 간단한 다리 스트레칭을 시켰다. 연습은 중단되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감독도 선배들의 부름에 체육관까지 내려왔다. 승대는 코치의 부축을 받으며 감독에게로 향하는 재유를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재유, 심하게 다쳤어?” 승대가 외쳤다.

“아니, 그런 느낌은 아니라……. 그냥.”

말은 이어지지 못했고, 적당히 내민 손바닥이 대신 얼버무렸다. 선배 한 명이 승대의 등을 두드려 라인으로 돌려보냈다. 감독과 상의를 끝낸 코치가 쿨다운을 지시했다.

천만다행으로 부상이 아니라 단순 근육경련이었고, 재유는 코치의 스트레칭과 안마, 찜질을 받고 느지막이 숙소로 돌아왔다. 승대가 씻는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자 쌓여있던 피로감에 속절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어제 잠만 한두 시간 더 잤어도 다리가 파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일 분 지났는지, 한 시간이 지났는지 가물거리는 채로 의식이 돌아왔다. 승대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와, 욕실의 습도가 퍼지는 것이 느껴졌는데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승대가 서둘러 다가왔다.

“재유. 다리 뭐래?”

“그냥 근육경련이다.”

“아……. 놀랬잖아.”

“내 냄새나나. 내일 씻을게, 미안.”

재유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됐다. 쉬어라.”

승대는 황당해하며 이불을 끌어 그의 위로 던졌다. 자기 베개를 재유의 아픈 다리 아래로 끼워주기까지 했다. 재유는 무척 감격했으나, 방 불이 꺼지자 곧바로 잊어버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성실하게 알람을 듣고 깬 재유는 누운 채로 목청만 열어 승대에게 기상의 고통을 그대로 패스했다.

“승대, 임승대. 인나래이. 니 먼저 씻어라. 내 아침 연습 안 가니까.”

승대는 아주 가늘게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아침 준비보다도 먼저 드는 생각이 있었다. 여전히 승대의 베개 위에 놓인 재유의 다리를 살폈다.

“……감독이 쉬라 카드나. 아직 아파?”

“괜찮은데, 혹시 모르니까 이틀 쉬래. 오후에 병원 가서 진료받고 근이완제 받아오라 하대.”

“내 오후 수업 없으니까 같이 가. 부축해 줄게.”

“아니, 됐다. 못 걷는 것도 아니고.”

“같이 가. 으디 초딩이 혼자 병원엘 갈라 하노.”

일정을 못 박은 승대는 머리를 헤집으며 욕실로 향했다. 물 흐르듯 섞인 디스에 재유는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할까, 욕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고민하는 사이 욕실 문이 이미 닫혀서 결국 모자란 잠을 더 채우기로 했다.

승대는 점심에 약속이 있다기에 재유는 농구부 선배들과 적당히 학식으로 때웠다. 정문까지 좀 걷는데 종아리에 여전히 불편함이 남아있어 굳이 서서 기다리지 않고 근처 벤치에 앉았다. 굳이 연락하지 않고 승대가 언덕에서 나타나길 기다리는데, 몰라볼 수 없는 실루엣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과 함께였다.

조금 놀라운 그림이었다. 나란히 걷는데 누구 하나 튀어 보이지 않았다. 아주 익숙한 얼굴은 아니고, 술자리에서 몇 번인가 인사한 적 있는 야구부 선배였다. 키가 크고 인상이 시원시원해서 인기가 많을 법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술자리에서는 촌스러운 과잠이라 몰랐는데, 평상복 입은 것을 보니 모델처럼 태가 좋은 사람이었다. 크고 잘생긴 두 사람이 나란히 교정을 걷는 이 풍경을 그대로 찍어서 서교대 홍보 팸플릿에 넣으면 적당할 것 같았다.

승대는 그를 데려와 인사시키지 않고, 앞선 골목에서 손을 흔들어 보낸 후 재유가 있는 벤치로 다가왔다.

“가자. 택시 탈래?”

“가까우니까 걸어가도 된다.”

재유가 벤치에서 일어서며 옷을 털었다. 부축해 준다는 게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는지 승대는 재유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웠다. 멀쩡히 걸을 수도 있고, 오히려 어깨가 불편했는데 그 임승대에게 이런 호의를 받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서 얌전히 몸을 기댔다.

가까워진 승대의 옷깃에서 향수 냄새가 났다. 기억하는 그 냄새였다. 재유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본 승대가 이유를 묻기 전에 다시 발을 옮겼지만, 병원에 가는 동안 계속 향이 코끝에 스쳤다.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승대는 가만히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숙소로 돌아가지 그랬냐는 물음에 그냥 어깨만 으쓱이는 그가 왠지 얄미웠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유난을 떨면 재유 자신이 더 약해 보이니까 싫었다. 답지도 않게 자상하게 구는 친구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자꾸만 고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알람도 듣지 못하고 얼빠진 상태로 깨어난 아침에, 승대의 빈 침대를 보자 괜스레 속이 끓었다. 경련이 있던 종아리는 오늘도 승대의 베개 위에서 퍼져있었다. 재유는 침대 위에 앉아 가만히 생각하다가 베개에 몇 번인가 주먹을 날렸다.

재유는 늦게나마 체육관에 가서 아침 연습에 참여했다. 물론 라인 밖에서 스트레칭과 가벼운 웨이트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뭐라고 외치고 부르는 목소리들이 아득하게 멀리 들렸다. 실전처럼 진행되는 코트 연습을 밖에서 앉아 구경하고 있으니 거의 유체 이탈의 감각이었다. 승대는 수비 연습에서 키가 재유만 한 동기 정훈에게 슛을 내줘 열을 받았는지 그에게 헤드록을 걸고 있었다.

‘승대 점마 옛날엔 누구랑 친해지는 데 오래 걸렸는데. 나랑도 일 년은 어색했다이가. 키 크면서 관심을 많이 받아서 외향형으로 바뀌었나. 아니면 어릴 때 갑자기 서울살이하느라 붙임성 좀 생겼는가 보네. 정훈이가 애들 중에 좀 착하고 살갑긴 하지.’

“진재유, 노니까 좋냐?”

멍하니 코트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코치가 다가와 농담을 건넸다. 정신이 든 재유가 곧장 대답했다.

“예. 좋네요.”

“슬슬 정리하게.”

코치가 웃으며 손짓했다. 몸만 푸는 대신 연습의 정리를 돕기로 했다. 마핑보이가 되어 대걸레를 들고 코트를 한 구역씩 밀고 지나가는데, 승대가 보란 듯이 닦은 자리 위로 땀을 털고 지나갔다. 재유는 짜증도 내지 않고 그 구역을 다시 닦으며 승대의 운동화 뒤꿈치를 바짝 밀어댔다.

결국 코치에게 핀잔을 듣고 둘이 남아 체육관을 정리한 뒤에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체육관은 숙소로 향하는 길을 끼고 옆에 야구부 그라운드를 마주하고 있었다. 야구부도 이제 아침 연습이 끝났는지 1학년들이 그라운드를 정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배로 보이는 몇 명이 펜스 문을 열며 나왔는데,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오, 승대 안녕.”

“안녕하세요, 형. 수고하셨슴다.”

“그래.”

어제 병원 가기 전 승대와 식사했다던 야구부 선배였다. 재유는 자신도 인사를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타이밍을 놓쳤고, 야구부 사람들은 스파이크화의 자박거리는 발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몇 마디 안 되는 인사가 왜 이리 징그럽게 느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임승대가 또박또박 형이라고 부르며 고개를 숙여서일까. 아니면 그 선배가 기특하다는 듯 괜히 등을 두드리고 가서일까.

그날 저녁은 감독의 허락이 내려와서 재유도 정상적으로 훈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재유가 몸이 굳은 기색도 없이 훈련을 따라오자, 동기 한 명은 쉬고 와서 좋겠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간만에 운동으로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목욕을 마치니 묵은때를 벗긴 것처럼 개운했다. 재유는 젖은 수건을 빨래통 위에 가지런히 널어놓고 침대로 뻗었다. 다리에는 여전히 승대의 베개가 걸쳤다. 그의 침대를 보니 대충 후드를 말아 베개로 쓰고 있었다.

“승대, 내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승대는 휴대전화로 퍼즐 게임을 하느라 웅얼거리면서 대답했다. 레벨이 2천몇이랬나……. 그 열정을 농구와 영어 공부에 쏟는다면 NBA도 농담이 아니라 실현할 수 있는 꿈이 될 것이었다. 재유는 승대를 태우고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향해 손 흔드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러자 승대의 옆자리에는 누군가 앉은 것이 이어서 그려졌다.

“그, 야구부 선배랑……. 썸타는 거야?”

재유의 물음에 엄지손가락 움직이는 것도 멈추고 잠시 반응이 없던 승대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게임이 꺼진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재유를 돌아보았다.

“누구. 민준이 형?”

“……응.”

“글쎄.”

“잘 생겼던데, 키도 크고…….”

무표정이 일그러지고 승대의 이마에는 핏줄이 섰다. 그는 짜증을 해소할 데가 없어 애꿎은 이불만 걷어찼다. 침대가 버겁다는 듯이 스프링 튕기는 소리를 냈다.

“그래, 나 게이다. 고만 떠봐라. 하이씨……. 이거 들어서 뭐 어쩌겠다고. 니 나랑 같은 방 쓰는데 계속 불쾌할 거 아니야.”

“불쾌할 일이 뭐가 있노.”

재유가 황급히 대꾸했다. 그러나 승대의 화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여태 모르게 해준 성의가 있는데 도루묵으로 만든 것은 재유라는 의미였다.

“괜찮은 척 안 해도 돼. 감독님한테 다음 학기에 방 바꿔 달라고 해.”

“싫다.”

재유의 단언에 승대의 심기가 거슬렸다.

“니가 남자 좀 좋아한다고 싫다, 기분 나쁘다, 불쾌하다, 그런 게 아이고. 그냥 맞는지 물어본 거다. 솔직히 실망했데이. 내는 니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그 정도 신뢰도 못 얻었나 싶어서.”

재유는 자신의 실수에 손을 벌벌 떨면서도 할 말을 쏟아냈다. 마음의 거스러미로 튀어나와 걸렸던 것들이 말로 뱉어내자 실타래처럼 풀리기 시작했다. 그 의중을 들은 승대는 아주 조금이지만 성질이 가라앉았는지 미간의 힘을 풀었다.

“……썸 아니야. 그 새끼 자꾸 마운팅해서 짜증 나고 내 취향도 아니니까.”

승대는 허탈한 목소리로 털어놓고 다시 침대에 돌아누웠다. 한참 넓은 어깨에서 침대로 툭 떨어진 머리가 기운이 없는 것이 지쳐 쓰러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니가 어디다 말하고 다닐 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승대가 휴대전화 홈 화면 위로 공허하게 엄지손가락을 놀리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재유는 잠시 안도했다. 어쨌든 그 선배는,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거구나. 게다가 승대가 최소한의 신뢰를 남겨주었다. 물을 엎지른 양동이가 다시 바르게 놓였다.

실수를 저질러 미안한 한편으로, 따져놓고도 여전히 서운했다. 들어보니까 연애까진 아니어도 뭐가 있긴 한가 보구만……. 끝끝내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에게도 심장이 식었다. 아무래도 약 때문이다. 근이완제가 뇌신경도 풀어버린 게 분명했다. 아니면 졸려서 판단력을 상실했든지. 뒤끝이 언제까지 갈지 모를 임승대를 이렇게 도발하다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걸 수도 있고.

자신이 이런 적극적인 실수를 한 일에 대해 재유도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승대를 신경 쓰고 있다. 꽤 최근부터의 일이었다. 무의식중에 사소한 변화를 눈치채고, 귀찮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함께했다. 농구에서 콤비로 화려하게 재결합한 것도 좋지만 숙소 방에서 단둘이 느긋하게 지내는 것도 좋았다.

중학생 시절 승대의 키처럼 애정이 자라나고 있었다. 정말로 키와 같다면 이렇게 자라나서 줄어들지도 않을 터였다. 재유는 승대가 매번 교실 문틀에 이마를 부딪히다가 점점 익숙하게 고개를 숙여 문을 나서게 되었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렇지 않아도 컸던 녀석이 불쑥 자라나니 농구의 신에게 선택받은 것 같아 그게 부럽고 질투 났는데, 한 번은 연습 때 구석에 주저앉아 쉬는 녀석을 발견했다. 왜 노냐고 묻자 성장통에 다리가 죽도록 아프다고 했다. 그렇게 아픈 줄은 모르고 시기한 마음이 못나게 느껴졌다. 쉬는 시간 내내 길어진 다리를 주물러줬더랬다. 그러는 동안 승대는 키가 작아도 활약하고 있는 프로 선수들에 대해 떠들었다.

애정이란 것도 그렇게 부딪히고 아파하다가 언젠가 익숙해질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됐으면 애초에 사랑 같은 것도 없다.

자꾸만 그에게 정성을 쏟으려 들었다. 시간을 좀 더 함께 보낼 궁리를 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으면 속이 좁아졌다. 씻고 나온 그를 너무 오래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눈치 빠른 승대에게는 절박함이 전부 드러나 보일 것 같았다. 그의 플레이리스트가 듣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이.

진짜로 방을 바꾸겠다고 하면 승대가 주먹을 몇 번 날리겠지만 깔끔하게 맞고 끝내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우정에 무언가 더해진 감정으로 그가 좋다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사귀고 싶은 건가?’

그 지점은 마음에 걸렸다. 이성 또는 동성에 관심을 가지거나 연애에 또래들만큼 요란 떨었던 적도 없고, 임승대와 애정 행각을 벌이는 풍경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탓이다.

‘내는 키도 작……지는 않다지만 금마가 커서 머리통 하나는 차이 나는데. 남자끼리 그래가 웃기기밖에 더하나. 임승대는 얼굴도 나름 반질하니 잘생겼다이가. 맞제, 코도 턱도 곧고 입술도 도톰해서…….’

재유는 승대가 이성 또는 동성에게 인기가 얼마나 있을지, 얼마나 능숙할지를 따져보다가 괜히 가슴만 답답해졌다. 이 모든 추측과 계산이 전부 의미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좋아하는 농구에서도 소극적이었는데, 알 수 없는 연애에서 확신이란 게 생길 리가 없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그러려니 하고 모른 척했던 주근깨가 다시 거슬리기 시작했다.

진재유는 아침에 거울 들여다보는 시간 좀 늘어난다고 지각할 인물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씻고 나오며 승대를 불렀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이불을 뒤집어썼는지 방 불이 켜지거나 말거나 침대에 한껏 웅크려 좀처럼 깰 줄을 몰랐다. 어제 동기들에게 불려 나갔다가 통금이 아슬아슬한 시간에 들어오더니 숙취가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재유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불을 걷었다. 말려 올라간 민소매가 굴곡진 허리를 드러내기에 상의는 살짝 끌어당겨 다시 덮어주었다. 어깨를 흔들어도 승대는 눈을 뜨지 못하고 뒤척였다.

“……일으켜도.”

“무겁다.”

승대가 허공에 팔을 휘적이기에 두 팔로 붙잡고 그를 끌어냈다. 거구를 겨우 세워놓고 재유는 옷을 빠르게 걸쳤다. 주말에는 연습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틀 쉬었던 만큼 연습량을 따라잡아야 했다. 아침에 조금이라도 일찍 나가기로 했다.

“먼저 간디.”

“어, 파이팅.”

승대는 아직도 세면대에 코를 박고 있었다. 매일의 인사일 뿐인데 파이팅, 그 한마디가 왜 그렇게 발걸음을 재촉하는지. 따로 나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돌아올 때는 함께 돌아올 테니 망설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주말의 연습 경기는 서교대, 준향대의 1, 2학년이 붙는 구성이었다. 학기 초 서로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진행했던 청백전을 제외하면 1학년들에게 처음 주어지는 경기였다. 감독, 코치와 선배들에게 능력을 선보이고 열정을 어필할 좋은 기회였다. 재유는 이 경기를 앞두고 다리가 아팠던 것이 못내 초조했고, 최근에는 승대 생각을 하다가 집중력에 주의받기도 한지라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일단 한 번은 내보내 주겠지만,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2학년 선배에게 고스란히 기회를 빼앗길 것이었다.

연습경기임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체육관에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스타팅이 아닌 재유는 라이벌 종수의 활약에 내내 전전긍긍하던 장도에서보다 꽤 여유가 생긴 승대의 플레이를 보며 다리 스트레칭을 조금 더 이어갔다. 역시 1학년 중에서는 가장 도드라졌다. 피지컬뿐만이 아니라, 풋워크가 선배들과 견줄 정도로 상당히 좋았다. 재유는 상대 수비 스타일을 살피는 동안 시선의 중심에 그를 두었다. 괜히 심란해질 짓 말고 경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이쪽에 직면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2쿼터부터 투입된 재유는 머리가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몸이 가뿐했다. 재유의 플레이가 곧장 두 번의 득점으로 이어지자 슈터 선배가 그의 센스를 칭찬하며 손바닥을 뻗어왔다. 재유는 하이 파이브로 응수했다.

경기 자체가 오래간만이었고, 유스 캠프 때 몇 분을 제외하면 승대와 같은 팀으로 출전하는 것은 무려 3년 만이었다. 내심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줄곧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선배들과 비교하면 한참 멀었겠지만, 승대라면 알아볼 것이었다. 얼마나 기민하고 능숙한 가드가 되었는지를 말이다.

단순히 그 손에 공을 꽂아줄 볼 핸들러가 아니라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령탑이 되었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들끓는 열정이었다. 재유가 약간 무리하게 감행한 패스 페이크에서, 승대는 공을 림으로 던져올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재유와 승대가 빠진 3쿼터에서 준향대가 흐름을 타게 되자 두 사람은 4쿼터에 다시 투입되었다. 승대는 파울도 네 개로 아슬아슬하고, 체급이 비슷한 준향 2학년의 빅맨의 수비에 다소 지쳐 보였지만, 재유가 눈길로 신호를 보낼 때마다 전력으로 달렸다.

재유는 체력 안배를 생각해 슈터에게 볼을 돌리고 승대가 주특기인 덩크나 픽앤롤 보다도 리바운드와 스크린에 집중하게 했다. 그러다가도 상대가 슈터로 빠지는 흐름을 읽거나 승대가 지루한지 볼을 달라고 외치면, 덩크 할 수 있는 구도가 나왔을 때 놓치지 않고 공을 보냈다.

두 번의 과격한 덩크 이후 앨리웁을 노리는 듯 림 옆으로 뛰어오른 승대가 수비 두 명에게 빠르게 블록 당했고, 재유는 노마크로 점퍼를 던졌다. 페이크였다. 그물을 찰랑이며 들어간 슛으로 2점을 더 달아났다.

“오늘 날아다니네?”

파울 없이 여유롭게 착지한 승대는 장난스러운 한마디와 함께 재유의 어깨를 퉁, 밀치고 백코트로 돌아갔다. 그 무게에 재유가 잠시 휘청였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순간 그의 왼쪽 귀가 반짝였다. 재유는 찰나에 알아보았다. 작년 겨울 선물한 피어싱이었다. 경기할 때는 액세서리를 빼야 한다. 아마도 빼는 걸 잊어 그 귀에 매달려있을 빛 한 조각이 눈동자 안에서 아른거렸다.

경기는 한 자릿수 차이로 서교대의 승리였다. 게임이 끝나 상대 팀과 악수하고, 준향대 1학년들과 인사까지 할 수 있었다. 재유는 준향에 무사히 안착해 슈터 백업으로 자리도 잡은 준수와 인사하게 되어 반가웠다. 하필이면 주전이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아서 출전 시간도 얼마 받지 못했는데 경기에는 져서 짜증이 난 준수와, 경기에 이겼다고 한층 더 능글맞게 친한 척하는 승대 두 사람의 대화를 유연하게 만드는 데에는 반드시 재유가 필요했다.

인사까지 마친 후 짐을 챙겨 라커 룸으로 돌아갈 때였다. 재유는 승대 옆을 바짝 따라가다가 팔꿈치로 허리를 툭 쳤다. 승대가 돌아보는 것을 확인하고 속삭였다.

“피어싱 안 뺐더라.”

“아……. 깜빡했다. 안 걸렸는데, 뭐.”

승대가 슬쩍 웃으며 귓불을 만졌다. 곧은 손가락 아래로 피어싱이 살짝 감춰졌다. 재유의 시선은 목덜미에 맺혀있던 땀과 함께 흘러내렸고, 가슴께에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가벼운 농구부 회식 이후 숙소로 귀가했다. 재유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승대는 머리도 다 말리지 못하고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잠들었나 싶어 다가가면 한 쪽 눈만 보이도록 고개가 빼꼼 돌았다. 재유는 머리 털던 수건을 의자에 걸쳤다.

포인트 가드 포지션에서는 2학년 선배가 더 오래 뛰었지만 센터의 경우 감독이 승대를 아끼면서도 꽤 매섭게 굴었기 때문에 승대는 거의 풀타임으로 뛰었다. 저학년 연습 게임이라고는 해도 대학 레벨에서 주전으로 경기를 뛴 것은 처음이었으니 굉장히 피곤할 터였다. 그래도 재유는 선뜻 물었다.

“편의점 갈래? 맥주 사서 우리끼리 축하하자.”

“니가 쏘게?” 이불에 파묻혀 웅얼거리는 목소리였다.

“그래. 한 캔씩만.”

“살 거면 네 캔 해야 싸지.”

승대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친구 지갑 털어먹을 생각이 알뜰하기도 하다. 슬리퍼를 끌고 방을 나서자 복도에서 마주쳐 인사받은 3학년 선배 중 하나가 이겨서 좋겠다고 엉덩이를 한 번씩 두들겼다. 그 한방이 꽤 매워서 두 사람은 손으로 엉덩이를 문지르며 도망쳤다.

맥주를 여덟 캔 사 들고 돌아오는 복도는 고요했다. 코치한테 들킨다면 군소리 정도는 듣겠지만 혼은 내지 않을 좋은 날이었다. 방에 들어선 재유는 조그만 좌식 테이블을 펼치고 맥주 두 캔을 올려놓았다. 나머지는 승대가 작은 냉장고에 아무렇게나 욱여넣었다. 마주 보고 앉으면 될 텐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유의 침대에 등을 대고 나란히 바닥에 앉았다. 맞은편의 어질러진 침대가 눈에 띄었다. 승대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켰고, 재유가 작은 볼륨으로 음악을 틀었다. 이긴 날엔 항상 더 클래시가 듣고 싶었다.

자연스러운 침묵 속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승대였다.

“나 감독한테 밉보이는 짓 했나?”

“아하하. 굳이 따지자면 이뻐하는 것 같은데.”

재유는 웃음을 터뜨렸다. 출전 타임이 곧 경험인데, 그게 다 키워주려고 그러는 거지. 그 뒤로 감독과 코치, 선배들, 동기들로 화제가 쭉 이어졌다. 팀에 대한 의리로 욕하는 일은 없었고 주로 어떻게 공략해 하루빨리 주전을 꿰찰지에 대한 논의였다. 그리고 누가 웃기다, 착하다는 둥 시답잖은 이야기들이었다.

최고의 안주는 언제나 농구였다. 놀자고 마시는 것인데 어쩔 수 없이 오늘 경기의 반성회도 진행됐다. 승대는 스태미나와 포스트 플레이, 재유는 동료들의 툴 파악과 몸 만들기라는 과제가 생겼다.

“내가 니 웨이트 빡세게 시켜줄게.”

승대의 음흉한 웃음에 재유는 몸서리를 쳤다. 슬쩍 궁둥이를 옮겨 멀어지자, 승대가 벌떡 일어나 새 캔을 꺼내 오더니 또 바짝 붙어 앉았다. 그가 앉으면서 부딪힌 어깨가 뜨뜻했다. 친절하게도 뚜껑을 따서 캔을 건네는 승대와 손끝이 스쳤다. 재유는 그가 목젖을 울렁거리며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는 동안 한 모금도 들지 않고 도로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불현듯 말해야겠다는 욕심이 떠올랐다.

“승대야.”

“어.”

“내 하나도 안 취했고, 니가 게이라고 놀리거나 그냥 해보는 소리 절대 아니다.”

“……어.”

“내가 요 며칠 생각해 봤거든. 근데 내……내가. 좋아하는 거 같다, 니를.”

말을 더듬는 순간 혀를 깨물고 기절하고 싶었다. 이따위로 멋없는 고백이 있을까. 이 순간을 취소하고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유를 더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나 손바닥 안에 고이는 식은땀이 아니라,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고 그저 무표정인 임승대였다.

“같다?”

“……어?”

“확실히 말해, 좋아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

고개를 조금도 숙여주지 않은 채로 반쯤 뜬 눈만 내리깐 승대가 조금 고압적으로 보였다. 그런 게 중요한가. 조금 긴가민가해도 그에게는 일단 충격적인 고백 아닌가. 재유는 침을 삼키고 울며 겨자 먹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거짓말이었다.

“확실해. 좋……좋아하는 게 맞다.”

시선을 피하려면 지금이었는데, 승대가 잠시도 눈을 돌리지 않아 사로잡힌 것처럼 마주 보았다. 평소에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하던 소꿉친구가 절대 읽을 수 없는 패턴처럼 보였다.

“너, 나 떠보는 거면 죽는다, 진짜.”

날카로운 협박에 재유가 홀린 듯 끄덕이자 곧바로 얼굴이 맞물렸다. 맥주 맛이 나는 입술이 문질러졌고 코끝이 부딪혔다. 승대는 쪼옥, 소리를 내며 잠시 떨어졌다가 재유의 놀란 얼굴을 한번 감상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확실히 긍정의 반응이기는 했다. 재유는 기쁘면서도 당장 멈추고 싶었다. 오늘은 말로 하면 안 될까. 하지만 승대는 전혀 봐줄 의사가 없었다.

어찌저찌 사귀더라도 스킨십은 어색해서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대답 비슷한 걸 들은 지 1분도 되지 않아 입안으로 뜨거운 욕정이 들이닥쳤다. 재유는 커다란 손에 얼굴이 붙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 핏줄이 선 손이 몇 번인가 어깨 아래로 내려가다가도 자제력을 발휘하는 듯 다시 올라왔다.

입술로, 뺨으로, 들러붙어 오는 묵직한 감정이 조금 무섭기도 했고, 휘슬이 울리자마자 재생되는 하이라이트에 짜릿하기도 했다. 승대가 떨어지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재유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호흡을 골랐다.

“와, 이거 진짜 구라 아니제. 끝내준다.”

승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왜……, 왜?”

“안 믿겨서.”

안 믿기는 건 이쪽이었다. 재유는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숨기려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진득한 키스 뒤에 이어지는 의외로 산뜻한 반응에 왠지 조금 빈정이 상했다. 끝내주긴 뭘 끝내주노. 지가 신나게 넘이랑 썸탈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도 모르고. 재유는 입을 문질러서 닦더니 말을 더듬거리면서 따졌다.

“승대, 니는……. 남자면 아무나 다 좋나. 뭐고, 이래 냉큼 받아주는 건. 이건 아니지. 그냥 내가 편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거면 됐다. 니야말로 내 떠보면 안 되는 기다. 진짜 감독님한테 다음 학기에 방 바꿔 달래서……”

“와. 진재유 이거, 아주 여우구만.” 승대가 하하, 연기하듯 소리 내며 웃었다.

“뭔 소리고.”

버럭 소리 지르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어쩐지 승대가 자꾸만 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백을 후회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을 때……

“내가 니 계속 좋아한 거 알고 이러는 거잖아. 좋아한단 말이 그렇게 듣고 싶나.”

“…….”

재유가 넋을 놓았다. 장난스럽게 웃는 승대의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걸 알았으면 하나도 떨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 얼굴 위로 많은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중학교 1학년, 키만 겅중 커서 깡마르고 뚱한 얼굴의 승대부터 점점 교복이 짧아지던 나날들과 고작 숫자인데 좋다, 싫다며 바뀌어 간 등번호.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앨리웁을 성공시키고 그와 마주친 손뼉의 얼얼함.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공의 소리와 들뜬 웃음소리. 평소에는 운동신경만큼 예민하고 키만큼 건방지면서, 간혹 다정하게, 또 즐겁게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마, 진재유, 진잼민, 재유, 재유야……

부산을 떠날 때는 웃지도, 부르지도 않아서 섭섭했더랬지.

재유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말없이 응시하자 승대는 점점 웃음기를 거둬들였다. 끈질긴 짝사랑이었다는 건 말하지 말걸. 그 얼굴은 아차 싶은 경악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또 새빨갛게 물들었다. 극악무도하게 첫 키스를 빼앗아놓고는 아이처럼 기뻐했으면서, 짝사랑 좀 들켰다고 벌거벗겨진 것처럼 부끄러워했다.

“아이씨……. 진작 들킨 줄 알았는데.”

재유가 겨우 한 학기 지켜보고 일주일 정도 가슴앓이를 하는 동안, 그는 드러내지도 않고 계속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런 게 사랑일까? 이제 나도 사랑 노래가 좋아질까? 수많은 록스타도 이렇게 세상에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을까? 재유는 참지 못하고 양팔을 가득 벌려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향수를 뿌리지 않은 그의 희미하고 보송한 체취에 얼굴을 파묻었다. 승대는 마음을 들킨 것이 그렇게 싫었는지 뻣뻣하게 물러났고, 재유에게 팔을 감지도 않았다. 다만 동그란 머리통에 뺨을 살짝 갖다 대었다.

그것마저 유치하고 섬세하고, 무척 사랑스러운 오랜 친구다워서 재유는 웃었다.

“쫌 자세히 말해 봐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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