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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에이 2차 창작
- 야쿠시 중심 Non CP
라이치는 그날이 세상의 끝인 줄로 알았다. 얼굴이 무섭도록 뜨겁고 눅진해 손조차 댈 수 없었고 들숨의 세 번 중 한 번은 막혀서 역류했다. 피부 위로는 바스락거리도록 건조한 이불이 덮였는데 그 속은 용암처럼 끓고 있었다. 머지않아 피부가 갈라지며 모든 열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열을 뿜어내는 것은 가스레인지요 끓고 있는 것은 냄비 안의 흰죽이었다. 죽이 끓는 사이 해가 저물었기에 라이조는 방으로 들어와 전등을 켰다. 쏘이는 빛에 라이치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린아이라기에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이 강제로 일으켜지고 손에는 숟가락이 쥐어졌다. 물을 탔는지 죽은 미지근하고 묽었는데, 맛이라고 할만한 건 미약한 소금의 존재감이 전부였다. 라이치가 그만두려고 해도 라이조는 그릇을 내려놓지 않았다. 아프고 맛이 없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올 만큼 괴로운 식사가 한참 만에 끝났다. 라이조는 그가 다시 눕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서둘러 방을 다시 나섰다가 들어왔다. 손에는 라이치의 어린이용 숟가락이 아니라 어른용 넓적한 숟가락이 들려있었다.
숟가락에 물을 조금 붓고 낮에 타온 가루약을 녹이자 라이치는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오브라트나 복약 젤리 같은 관용은 없었다. 밀어내는 팔에도 속수무책으로 붙잡힌 채 쓰고 축축한 약을 전부 삼켜야 했다. 작은 어금니가 쇠숟가락에 잘게 부딪혔다. 라이치는 이제 정말로 눈물이 나왔다. 그의 인생 최초로 망할 아버지라는 말을 떠올린 순간이다. 헐떡이는 숨에 누우려는데 큰 손바닥이 등을 받쳤다. 숟가락이 다시 다가왔고 이번에는 주홍빛의 물 탄 가루약이 아니라 희고 부드러운 설탕이 소복이 뜨여있었다. 라이치는 코로 숨을 쉬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숟가락을 잠시간 가만히 물고 있었다. 설탕이 입안에서 전부 녹을 때까지.
이것이 라이치가 어린 시절 앓은 날의 기억이다. 혀끝에 남은 단맛 외에는 모든 감각이 눅눅했으므로 라이치는 자라면서 꿈이었다고 여기게 됐다. 앓았던 일은 입안의 설탕과 함께 전부 녹았다.
식은땀이 나고 청각과 후각이 혼미했다. 라이치는 대체 얼마만의 감기인지 햇수를 세어보다가 머리가 팽팽 돌아서 그만뒀다. 옆자리에서 저들끼리 떠들던 급우 중 한 명이 눈을 흘겼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커서였다. 라이치는 금세 의식하고 호흡을 가라앉히려 엎드렸다. 입학하고 처음 입어서 새것인 게 티가 나는 반소매 교복 셔츠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라이치의 몸에 열이 나는 것처럼 날씨도 빠르게 더워지고 있었다. 여름대회가 곧인데 이러면 안 된다. 해내야 할 숙제가 많았다.
망할 아버지. 야구가 이렇게 복잡한 거라고는 왜 알려주지 않은 거야. 하다못해 캐치볼이라도 좀 더 자주 해줬더라면. 고등학교에 입학해 야구부에 들고, 그저 휘두르는 것만이 야구가 아니란 걸 알고 나서부터 토도로키 라이치는 인생 최고로 바빠졌다. 치고 나면 달리고, 잡고, 던져야 했다. 공이 자신을 향해서만 날아오는 게 아니라는 것도, 팀플레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도 처음 깨달았다. 공을 때리는 일에서는 이 왜소한 1학년을 따라올 부원이 없었고 그 외의 일에서는 그 어떤 패기 없이도 루틴을 지켜온 선배들이 훨씬 능숙했다. 감독은 개의치 않는 듯했지만 라이치는 제대로 된 야구를 하려면 분발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이렇게 기운 없이 고개나 겨우 주억거려서는 안 됐다. 오늘도 연습, 또 연습이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스윙.
멍한 머리로 간신히 연습의 루틴을 헤아리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야, 교실 문 잠가야 하니까 빨리 나가. 말을 건넨 학생은 라이치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다 은근한 불쾌감을 드러내며 손을 물렀다. 다음 교시가 이동수업이었다. 이미 몇 명 외에 모두 빠져나가고 교실은 텅 비어있었다. 미안. 라이치는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곤 벌떡 일어서 복도로 나갔다. 교과서도 챙기지 않았다는 건 교실 문이 잠기고 나서야 깨달았다. 일어서니 발바닥으로 피가 빠지는 것 같았다.
"너 설마 어디 아프냐?"
교실에서부터 같이 내려왔는데 부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미시마가 물었다. 라이치는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그래도 대답은 했다. "아냐." 그가 관자놀이로 흐르는 땀을 닦고는 희미하게 짜증을 흘렸다. 아키바는 놀란 얼굴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사실은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라이치가 설마…' 하는 마음에 그저 오늘은 바나나 챙기는 거라도 깜빡했나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코까지 훌쩍이자 그제야 확신이 들었다.
"감기인가 보다." 아키바가 말했다.
"에이, 아니라잖아." 미시마가 우겼다.
그때 부실 문이 벌컥 열려 미시마의 엉덩이를 떠밀었다.
"어이."
짧은 부름으로 인사를 대신한 사나다가 들어왔다. 교복 셔츠는 어디 가고 이미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친구들이 깍듯하게 인사하는 동안 라이치는 고개만 무겁게 수그렸다. 몇 번의 연습 경기가 있고나서 선배들과 부쩍 친밀해지기는 했지만, 야구를 하고 있지 않으면 여전히 어색했다. 사나다가 원래도 대하기 쉬운 타입은 아니었다. 라이치는 원래도 누군가를 쉽게 대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라이치는 돌아서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키바와 미시마는 아직도 라이치가 진짜 감기에 걸렸는지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둘을 지나쳐 부실로 들어가려던 사나다가 잠시 멈추고 물었다. 턱은 라이치를 향해 까딱였다.
"감기래?"
"이 녀석이 그런 거 걸릴 리가 없어요." 미시마의 즉답. 사나다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자 아키바가 멋쩍게 웃더니 미시마의 어깨를 툭 쳤다. 아픈 걸 보고도 그러냐.
"얘랑은 어려서부터 알았는데 감기 걸린 건 저도 처음 봐요. 라이치, 너 괜찮은 거 맞아?"
"괜찮다니까. 다들 이상하게 왜 그래."
허둥대는 목소리가 삐끗했고, 연달아 기침이 이어졌다. 그는 다급하게 팔로 입을 막았지만 마른기침 소리를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이상한 쪽이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선배와 친구들이 말이 없는 동안 모르는 척 돌아선 라이치가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연습을 하려면 옷을 갈아입는 게 먼저다.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으면 좀 나을 거다. 컨디션이 나쁘다는 게 자명해지자 마음만 급해졌다.
"뭐해?"
사나다가 물었다. 라이치는 여전히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있음을 의식했다. 뭐 하냐니. 유니폼으로 갈아입어요. 그는 서툴게 대답하는 대신 이상한 웃음을 흘렸다. 사나다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뭐야? 이 녀석. "오늘 연습 하려나 본데요." 미시마가 해설해주었다.
"뭐? 이 상태로 연습을 어떻게 해. 집에 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비교적 세심한 면이 있는 아키바는 나름의 걱정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선배의 단호한 말에 어쩔 줄 모르던 라이치는, 어설프게도 무시하는 것을 택했다. 웃는 건지 마는 건지 얼굴을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돌리고 단추를 계속 풀어 내려갔다.
졸지에 후배에게 무시당하고 만 사나다는 목덜미를 긁적이다 몸을 돌려 자신의 캐비닛을 열었다. 다들 그러려니 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동안 부원 몇 명이 더 들어오고 인사를 했다. 라이치가 착의를 마치고 식은땀에 차가워진 내의를 구겨 넣을 때였다. 침묵하던 사나다가 스파이크화를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뭘 그렇게까지 하냐."
반쯤 중얼거린 말이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게 나갔으나 그마저도 하고 싶은 말의 일부였다. 네가 대단한 건 알겠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 어느 쪽이나 불편하게 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원들은 눈치를 살폈고 라이치는 양말만 신고 서서 스파이크화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쉬라는 말이야." 사나다가 굳어진 공기를 무마하려고 부연했다. 그렇게까지 하니까 대단하다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고집이란 무서운 구석이 있어서 들여다보는 사람을 일단 물러서게 했다.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도 배트를 휘두르겠다고? 이해 못 할 사고방식. 그러니까 사나다는 당황한 것뿐이다.
"라이치라면 땀 흘려야 나을 거예요." 언제나 분위기를 책임지는 미시마가 가볍게 말했다. 아키바는 역시 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사나다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 라이치는 여전히 스파이크화를 든 채로 안 그래도 뜨거운 머리가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평소 하던 일을 하려는 것뿐인데 몸이 아픈 것만으로 뭐가 이리 복잡해졌을까? 그때 구원 아닌 구원으로 감독이 부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야, 교장이 얘기하자고 부르지 뭐냐. 먼저 러닝들 하고 있어라. 주장 오면 말 전하고 늬들끼리 시작해." 라이조가 몇 없는 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감독님." 곧바로 돌아나가려던 그를 사나다가 불러세웠다. "라이치 감기래요." 라이치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 동공이 더욱 작아 보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근데 연습하겠다고 해서."
"많이 아프냐?"
사나다의 말을 끊은 라이조가 환자에게 물었다. 척 보기에도 땀으로 머리가 눌러 붙고 눈이며 어깨가 무거운 몰골이었으니 물음의 의도는 따로 있다고 부원들은 짐작했다. 라이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그제야 허리를 수그려 스파이크화를 신었다. 조용한 가운데 코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그 녀석이 한다면 하는 거야."
라이조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돌아섰다. 지도하는 팀에 아들을 두고도 문제가 없으려면 적극적으로 편애를 피해야 한다. 생각보다 더 매몰차게 구는 게 맞다는 뜻이다. 라이치는 그런 이치 따위 몰랐지만, 아버지와 자신은 그게 자연스럽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괜히 섭섭했다. 다들 쉬라고 하는데. 이런 날엔 안 하는 게 '보통'인데. 아키바가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마치 그게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곧바로 라이치의 입이 반짝 열렸다.
"아버지."
사나다는 조금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땅만 쳐다보고 있던 라이치는 이제 감독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운이 있었더라면 또 실랑이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라이조는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보더니 수염이 말끔히 다듬어지지도 않은 턱을 문질렀다. 평소와 같이 다그치지도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나, 오늘은 그냥……"
"웬일이냐? 네가 나약한 소릴 다 하고. 젠장, 연습 빠져서 좋겠다."
미시마가 중얼거린다. 부실에서 쉬다가 상태 좋아지면 나오던가 해라, 그게 감독의 조치였다. 라이치는 간신히 서서 부실 모서리에 나란히 늘어져 있던 책상 네 개가 한 조각으로 붙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배들이 없을 때나 써먹던 밋시마 특제 침대다. 높이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기술이 필요하다. 항상 부실에 굴러다녀서 언제부터 있었는지, 언제 마지막으로 세탁했는지 모를 퀴퀴한 모포가 책상 위에 깔렸다. 라이치는 그걸로 대접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밋시마, 고마워." 코 막힌 목소리가 웃는다.
"고마우면 이름이나 똑바로 부르던가." 미시마가 투덜거렸다.
이번에는 미시마의 저지가 라이치 위로 덮였다. 봄에 쓰다 그대로 부실에 남겨둔 탓인지 모포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미시마가 불을 끄고 문을 나서자 어두운 부실 안에 혼자 남겨졌다. 이렇게 고요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코를 훌쩍이며 한참 천장을 보고있자니 아득히 먼 곳에서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참여하지 못한 연습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내 까앙, 까앙 하고 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치는 잠들기 위해 양을 세는 대신 그 소리에 맞춰 머릿속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야, 라이치."
들리는 목소리는 너무 먼 것 같기도, 지나치게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어깨를 흔드는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라이치는 쏟아지는 형광등 빛에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잠에서 깼다. 미안. 작은 사과가 들린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따가운 코를 휴지로 문지르고 있자 손바닥과 종이컵이 불쑥 다가왔다. 아키바였다. 뛰어온 것처럼 땀을 흘리고 있었다. 라이치가 물과 알약을 받아들자 아키바가 숨을 돌리려는 듯 침대, 아니, 책상에 걸터앉았다.
라이치는 단단한 손에 놓인 단단한 알약을 보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알약이라고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가루약이었으면 끔찍했을 거다. 챙겨둔 봉투를 보니 일부러 약국까지 다녀온 모양이다. 망설이느라 잠시 약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다가 단숨에 털어 넣었다. 쓴맛이 올라오기 전에 물로 흘려보낸다. 그래봤자 눈물이 비집고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목에 걸렸을 때 불쾌한 건 기침이든 알약이든 똑같다. 해열제랑 종합감기약이야. 안 듣는 것 같으면 한 알 더 먹어도 된대. 아키바가 설명했지만 라이치가 한 알 더 먹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습은?" 참았던 호흡을 몰아쉰 라이치가 간신히 물었다.
"잠깐 휴식."
"약 얼마였어?"
"그건 됐어. 미시마도 보탰고."
라이치는 이렇게 신세를 졌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고 아키바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이제 가야 하는데…. 아키바가 땀이 흐른 뒤통수를 문지르고 중얼거렸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더운 바람이 나른했다.
"네 핑계 좀 대자. 네가 안 일어나서 깨우느라 늦었다고."
아키바의 말에 라이치가 가슴을 들썩이며 웃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키바도 조금 웃었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성실한 그는 라이치가 다시 잠들기도 전에 나가서 연습에 복귀했다. 약 기운에 머리가 울렁였는데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눈치채기도 전에 졸음이 쏟아졌다.
문이 벌컥 열리고 부실에 들어찬 왁자한 소리에 라이치는 눈을 번쩍 떴다. 부실 안으로 선선한 저녁 바람과 함께 뜨거운 열기를 품은 땀 냄새가 훅 끼쳤다. 라이치는 다시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에 안심했다. 고되다고 할만한 연습이었는지 평소보다 더러워진 유니폼을 하나둘 벗어던졌다. 웅크린 등 위로 누군가의 유니폼이 떨어졌다. 라이치는 유니폼을 걷어내고 몸을 돌려 바로 누웠다. 전등이 눈부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자 웃음기 어린 감탄이 들렸다. 우와, 죽는 거 아니지? 사나다가 그를 내려다보며 전등을 가렸다. 그리고 곧장 무언가를 휙 들이민다. 라이치가 놀라서 눈을 질끈 감는 동시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자, 마셔."
동그란 이마 위로 푸른 캔이 균형을 잡고 섰다. 사나다가 건넨 포카리스웨트는 라이치와 마찬가지로 식은땀을 흘리느라 축축했다.
"왜 포카리예요?" 라이치 머릿속의 의문을 아키바가 대신 꺼냈다.
"몰라? 원래 감기 걸리면 포카리잖아." 사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라이치가 이마 위의 캔을 붙잡으며 몸을 일으켰지만 감사 인사를 꺼내기도 전에 그는 자기 캐비넷 앞으로 돌아갔다. 잠시 우물거리던 라이치는 참을 수 없이 목이 말랐기 때문에 바로 캔을 따서 마시기 시작했다. 시고 단 맛이 혀에서 느껴지자 몸의 다른 감각들도 서서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감기 기운은 묵직했고 숨은 자유롭지 않았는데, 몸을 풀고 연습을 마무리하는 부원들을 지켜볼 여유는 생겼다. 집에 가려면 다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라이치는 가만히 앉아 천천히 캔을 비웠다. 어차피 라이조가 일을 끝내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좀 더 쉬는 셈 치고 기다렸다가 가도 괜찮았다.
라이치가 힘없이 앉아있는 부실의 가운데로, 부원들의 시답잖은 대화가 들려왔다. 야구 외에 좋아하는 것, 야구 외에 몰두해있는 것,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 라이치는 대화의 대부분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말았다. 다만 라이치에게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떠들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런 순간이었다. 밋시마가 새로 시작한 야구 게임, 영어가 특히 꽝이라는 히라하타 선배의 성적 고민, 정작 체육 시간에는 땡땡이를 치더라고 추락해버린 사나다 선배의 평판, 앗키에게 여동생을 보여달라고 조르는 삼학년 선배들……. 라이치는 손가락만 놀리는 게임이 뭐가 야구라는 건지 궁금했다. 뭐든 잘할 줄 알았던 선배들이 학업에서 그저 그렇다는 건 의외였다. 앗키의 동생이 형제를 쏙 빼닮은 건 자신과 미시마만 아는 일이라 재미있었다. 음료수의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는데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인 라이조마저 야구부에서 일하니, 하나뿐인 가족에게 부원들의 일상을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봤자 다 아는 이야기거나 알면 안 되는 이야기임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반에서 친구를 사귀었다면 야구부의 소식을 많이도 전했을 거다. 그러면 누군가는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야구부를 응원하거나 구경하러 올지도 모른다. 가끔은 야구부가 얼마나 재미있고 멋진 곳인지, 길에서 마주치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크게 떠들고 싶었다.
하지만 라이치는 답지 않게 그럴 것 없이, 그냥 마음에 쌓아두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빨리도 쌓였다. 그게 입에 잠시 물고 녹일 만큼은 되었다.
라이조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얕은 잠에서 깼다. 가늘게 뜨인 눈으로 어두운 문밖을 응시하자 익숙한 인영이 조금씩 움직였다. 감기 기운이 가셨는지 움직임이 제법 평소대로 돌아온 라이치였다. 라이치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코를 훌쩍이며 주전자의 미지근한 물을 물병에 담았다. '아프다더니, 달밤에 체조냐.' 라이조는 잔소리를 던지려다 관두었다. 그냥 무거운 눈꺼풀을 붙들고 라이치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비는 짧았다. 언제나 손 닿는 곳에 세워진 묵직한 나무 배트가 들린다. 낡은 문의 경첩이 울지도 않고 조심스레 열린다. 노란 가로등 불빛이 집 안에 잠시 스며들었다가 사라진다. 라이치가 자기 일을 하러 나선다. 느린 발걸음이 더듬더듬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흐려지다가 이내 사라지고 나서야 라이조는 간신히 다시 잠들었다. 그 날따라 밤이 아주 길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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