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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아몬드 에이스 2차창작
- 쿠라모치 생일 기념 글
"뭐? 코시엔 나가는 거야?"
"당연히 나가지!! 이런 화려한 무대, 앞으로 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사와무라가 불펜의 검은 흙을 쥐었다. 부원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만약 후루야가 어중간한 플레이를 보여줬다면 고작 봄 선발의 흙을 가져갈 마음은 들지 않을 거다. 에이스라는 칭호에 이견이 없을 압권의 피칭, 사와무라는 자신이 흙을 쥐어 든 그 자리에서 두 눈 뜨고 똑똑히 보았다. 쿠라모치는 검은 그라운드 위에 웅크리고 있던 사와무라가 하얗고 곧은 선으로 다시 일어서기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리고는 마찬가지로 하얗게 눈이 부신 자신의 유니폼을 내려다보았다. 이리저리 구르거나 미끄러지지도 않고, 흙에 더러워질 것도 없이 깨끗한 유니폼으로 경기를 마친 게 덜컥 창피스러웠다. 부원으로서 에이스에는 비할 것도 없는 초라함이, 스스로의 미달이 새삼스레 거대하게 다가왔다. 에이스와 그 뒤를 바짝 쫓는 라이벌이 아니라, 경기에 서고도 별 볼 일 없었던 야수라면 어디의 흙을 담을까? 쿠라모치는 괜히 부드러운 흙만 불퉁한 신발 밑창으로 긁어댔다. 사와무라가 돌아오자 남아있던 부원들도 내내 염원했던 그 경기장을 나서야 했다.
방과 후 들어선 교무실은 지나치게 정숙했고 쿠라모치는 어울리지 않는 곳에 들어선 양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학급 모두가 순서대로 거치는 진로 상담이라지만 가능한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학생 상담이니 진로니 하는 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이 골치만 아픈 주제인 데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교무실은 혼나기만 하는 공간으로 각인되어 표찰만 봐도 질려버리니 그렇다. 옅은 프린터 잉크 냄새와 실내용 화분의 풋내를 맡고 자연스레 오금이 저리자 종이 울리면 침을 흘리는 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쿠라모치는 건들거리며 담임의 자리로 직행했다. 예전이라면 책상이든 담임의 의자든 일단 털썩 앉고 봤겠지만 야쿠자 같은 야구부 감독을 깍듯이 대하는 것에 버릇이 들어버린 지금의 그로서는 그저 다가오는 담임을 향해 멀거니 서 있을 뿐이었다. 담임은 싸구려 티백만 두 개 꽂은 머그를 들고 와 자리에 앉았고 그에게도 허락을 내렸다. 쿠라모치가 학생용으로 둔 스툴에 앉자 삐끗, 하고 몸이 기울었다. 연결된 다리가 헐거운 건지 조금 망가져 있었다. 학급 전부를 여기다 앉힐 셈인가? 연습도 미루고 찾아온 상담에 세상도 기울어지고 만 상황이 여간 불만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는 그런 김에 일부러 의자를 건들거리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자 담임이 등진 창으로 봄의 오후 햇살이 화사하게 쏟아졌고 마주 보자니 눈이 부셨다. 쿠라모치는 안 그래도 좁은 미간을 더 구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담임의 슬슬 벗겨지려는 머리가 더욱 빛났고 말을 시작하자 두피가 움직이는 것마저 보였다.
"진로희망조사서는 써 왔냐?"
"아? 아뇨. 완전 까먹고 있었는데."
"그럴 줄 알았다."
지나치게 진해 보이는 차를 한 번 마시더니 담임이 이어서 말했다. 운동부 녀석들은 주제 파악을 잘해서 큰 걱정은 없다만, 역시 확실하게 드래프트 지명될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면 대학도 고려해야지. 너도 알고 있지? 스포츠 추천 입학이 될지 안 될지는 네 감독님이랑 상의해봐라. 자. 네 성적으로 확실하게 갈 수 있는 대학은 여기나 여기 정도. 뭐? 참, 본가가 치바랬지. 일반입시로 대학 갈 거면 통학하고 싶다고. 기숙사도 있는데 꼭 그래야 하냐? 이런…. 담임은 목덜미를 긁적이더니 잠시 서류를 뒤적였다. 그러면 잘 봐서 여기도 괜찮아. 이것도 시험이나 면접에 따라 아슬아슬하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든 성적을 준비하든 해라. 뭐 그래도 카타오카 선생님이 군기는 확실하게 잡으시니 야구부는 사정이 좀 낫지. 1학년 때부터 성적은 꾸준히 올랐네. 그래도 이거 가지고는…. 역시 공부도 좀 확실하게 해라, 확실하게. 운동부 녀석들은 삐끗하면 막노동으로 빠지기 일쑤란 말이야. 너도 졸업해서 고작 편의점이나 공사판 출근하려는 거 아니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쿠라모치가 쏘아붙였다.
"고3 담임만 4년째다. 운동부 학생 뒷바라지하려면 친절한 말로는 안 된다는 건 알지."
어쩐지 애들이 상담만 갔다 하면 울면서 돌아오더라니. 확실하게, 쿠라모치는 담임의 말버릇이 거슬렸다. 당장 내일 경기가 어떻게 될지도 알 수가 없는데 확실한 게 어디 있겠는가. 뚜렷이 알 수 있는 건 오늘 청심관의 저녁 메뉴에 감자고로케가 있다는 것 정도다. 아니, 사실 가끔가다 예고 없이 메뉴가 바뀌기도 하니 거기서조차 그가 모르는 실망이나 기쁨이 생기기도 하겠다. 무릎에 얹어두었던 주먹이 몇 번이고 쥐었다 펴졌다. 그 위로 담임이 이면지에 출력한 대학이며 학원 자료가 불쑥 올라왔다.
"잘 따져 보고, 진로조사 계속 받을 거니까 뭐라도 써 와라."
"네, 네."
쳇, 뒷바라지는 무슨. 쿠라모치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마침내 삐걱거리는 스툴에서 일어나 돌아서던 그는 파티션 맞은편의 조용히 일하던 교사가 타카시마 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타카시마와 눈이 마주쳤고 반사적으로 고개가 굽었다. 아마도 상담의 내용이 다 들렸을 것이다. 그의 놀란 얼굴에 타카시마는 웃어주었지만 묘하게 유감스러워 보였다. 그 유감은 담임의 무성의한 언행에 대한 위로가 반, 딱히 알리고 싶지 않은 대화였을 텐데 들어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이 반이었다. 야구부 생활과 학교생활은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과 같아서 부원이자 학생인 쿠라모치나 부부장이자 교사인 타카시마나 태도가 다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를 직접 세이도로 데려온 야구부 부부장으로서가 아닌, 교사로서의 타카시마는 달리 해줄 말이나 챙겨줄 시간이 많지 않아 안타까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필이면 학교생활 중에서도 허술한 부분을 들켜버린 쿠라모치는 조금 민망했고 서둘러 교무실을 나섰다. 행동거지가 조심스럽지 못한 탓에 문을 닫기까지 부산스러운 소음이 이어졌다. 쿠라모치가 사라진 교무실은 곧바로 다시 적막해졌다.
성적이 조금이나마 오른 것은 다행이었다. 교과서를 쳐다보는 건 위인들 얼굴 위에 낙서하는 시간이 전부였던 중학교 때는 야구라는 기회가 사라지니 선택의 폭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타카시마 선생님의 눈에 들지 않았다면 담임이 경멸하는 학생 중에 내가 있었겠네, 생각한 쿠라모치는 헛웃음이 나왔다. 딱히 습관이 든 건 아니지만 야구를 위해 대충 성적을 맞추려 하니 공부란 게 못 할 짓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와 부원들이 그라운드에서 땀 흘리는 동안 학원에 가고 자습을 하는 학교의 모범생들과 비교할만한 성과도 못 되었다.
2학년 때부터 문제집 사 들고 다니던 야구부 녀석들도 제법이구만. 추천 입학 없이 대학에 가려면 지금 당장부터 여간 귀찮은 게 아니겠지. 등록금 문제도 있는데, 지금은 엄마 혼자 일하는 처지니까 내가 벌어서 쓸 수 있는 한도 내로……. 아니지, 꼭 대학에 가야 하나? 어차피 중딩 때는 상상도 못 했어. 고등학교도 학원 입시로 준비하는 옆 동네 범생이들이나 대학에 가겠거니 싶었는데. 어중간한 학교에 관심도 없는 학과로 들어가느니 아르바이트하며 자격증 따서 취직하는 게 낫겠다. 원래 가고 싶었던 나루타공고, 거기 들어갔으면 야구 관뒀어도 적당히 취업으로 빠질 수 있었을지도. …토모가 자기는 공고 갈 거라고 그랬는데. 제대로 붙었을까? 그 녀석 머리 너무 나쁘니까 차라리 찍는 게 더 잘 나오는 성적이었지. 그래도 바이크라면 죽고 못 살아서 학교는 빠져도 바이크샵은 매일 출석 찍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기술 배우면서 일할 거랬어. 걱정 안 해도 돼. 이노우에 씨도 있지. 낮에는 철근 박고 밤에는 라이딩하는 대책 없는 아저씨였잖아. 아― 멋있었지. 머리 벗겨진 생물 선생은 모른다니까, 그런 거……
……대학 야구까지 할 수 있으려나.
헛돌던 머리가 드디어 원점으로 돌아왔다. 연이은 커다란 무대와 눈물마저 쏙 들어가도록 간담이 서늘한 패전에 2년간 통성명도 하지 않았던 진로 걱정이 대뜸 발목을 붙잡았다. 선배들의 졸업을 지켜보면서 은근히 많은 부원이 야구를 그만둔다는 것도, 계속되는 야구란 게 제법 부담이라는 것도 알았다. 어릴 때는 친구들이랑 공원에 나가기만 하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게 야구였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그렇게 돌아가질 않았다. 고려도 안 해본 현실적인 문제에 가능성이 점점 불순해졌다. 야구에 선택이 걸려있다. 쿠라모치에겐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떠나보낼 마음이 들었을 때가 아니면 시원스레 놓아주는 일은 영영 없으리란 걸 한 번 잃어봐서 알았다. 어리지 않게 되는 건 성가신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젠장, 누구를 때려서 사고 친 것도 아닌데 앞날이 이렇게 막막하다니. 펼쳐둔 진로희망조사서에 의미 없이 끄적이던 샤프심이 부러졌다.
그리고 사람은 정적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갑작스레 조용해진 교실에 쿠라모치는 헛숨을 들이켜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광등을 등지고 어둑해진 선글라스에 보이지도 않는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개 선생이었다면 대충 능청스레 웃고 말았을 텐데 카타오카 감독이라면 꼬리를 말고 수그리는 게 상책이었다. 감독이 누누이 말하듯 수업에 집중하지 않으면 학생 본분을 잃고 야구에도 어쩌고저쩌고…
"죄송합니다."
쿠라모치가 잽싸게 진로희망조사서를 접어 서랍 안에 넣었다. 카타오카는 아무 말 없이 책상 줄 사이로 마저 걸었다. 카타오카 '선생님'은 그닥 엄하지 않다. 쿠라모치는 항상 그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라운드에서의 무서운 모습이었다면 한결 편했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한숨을 느리게 뱉었다. 접어 넣은 진로희망조사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라운드에서보다 한결 점잖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국어 선생이 학생 하나를 시켜 교과서의 지문을 읽게 했다. 계절이 바뀌기 시작해 나른한 오후,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낭독이라기엔 지루한 어조로 교실 안을 울렸다.
"……그러니까 달리는 거야. 믿음을 받고 있으니까 달리는 거야. 아직 늦지 않았다고. 늦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인간의 목숨도 문제가 아니고. 나는 뭐랄까, 좀 더 어마어마하게 큰 것을 위해 달리고 있는 거야. 따라오라고, 피로스토라토스."
연습경기라 한들 하쿠류로부터 얻어낸 승리의 의미는 컸다. 기분 좋은 경기로 골든 위크가 마무리되면서 사기가 번쩍 올랐고 이어지는 주말의 연습 경기에서도 한명 한명이 자기 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미유키가 여느 때와 같이 난데없는 로맨틱한 말로 동료들에게 점수를 땄다. '지금은 너희랑 코시엔 가는 것밖에 안중에 없어.' 열혈 청춘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주장의 그 말에 설레지 않을 부원은 없겠지만, 3학년들은 이미 면역이 된 듯 퉁명스레 받아쳤다. 가끔 보면 쑥쓰러운 줄도 모르고 느끼한 소리를 하는 게 미유키였다. 그래도 내심, 그 말에 비로소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결심이 든 것도 사실이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쿠라모치는 경기 분석만큼이나 잘 정리된 나베의 영어 필기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골몰하고 있었다. 필기하는 볼펜의 색을 바꿨다가(어차피 필통에는 검정과 빨강, 딱 두 자루만 들어있었다), 두 개의 필기 노트를 서랍에 넣었다가, 영어 교과서는 덮자마자 다음 교시가 영어인 걸 깨닫고 다시 펼쳤다. 산만함이 그야말로 야구-오프 모드의 쿠라모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교실 뒤편으로 향하더니 미유키의 앞자리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자리로 돌아오려던 책상의 주인은 쿠라모치가 앉는 것을 보고 다시 친구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쿠라모치는 그런 상황 따위는 모른 채로, 미유키에게 거의 시비 걸듯 물었다.
"어느 구단 갈지 안 정했다는 거 진심이냐? 그래도 갈지 말지 정도는 정했겠지?"
"나 참, 오래도 물고 늘어진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해줘? 여름에 활약할 수 없으면 꽝이라는 거야. 예상대로 배배 꼬인 답이 돌아왔다. 대충 흘려들은 쿠라모치가 어디서 연락해왔는지 넌지시 물었고, 미유키가 가물가물한지 손가락을 접어가며 알려주었다. 늘 그렇듯 귀찮아하면서도 잘만 떠들어댔다. 말을 받은 쿠라모치가 이 팀의 팬이었다느니, 저 팀의 어느 선수가 멋있다느니 떠드는 소리를 미유키도 마찬가지로 대충 흘려들었다. 대화의 주제가 흐려지자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던 미유키가 다시 본론을 꺼냈다.
"직업이 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아직 실감이 안 나는 것뿐이야. 왜 너희가 재촉하는지 모르겠네."
"뭔 느긋한 소리래. 언제까지나 애가 아니라니까."
중학생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쿠라모치는 자신이 반사적으로 뱉은 말에 소름이 끼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기숙사에 가기 위해 집을 나올 때의 엄마와 할아버지 얼굴이 생각났다. 문을 닫는 순간까지 잔소리가 이어졌더랬다. 그때, 집을 떠나서까지 야구를 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기분인가?
"야구를 계속할 수 있다면야 뭐. 그러는 너야말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목적 없이 붕 뜬 대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미유키는 3학년 들어서야 선수나 학생끼리의 솔직한 대화에 입이 좀 트였다. 쿠라모치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몸을 수그렸다. 싫은 소리를 들어 미적거리는 어린애 같았다. 한참 만에 답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답이 돌아왔다.
"너 야구 왜 하는데?"
전직 양아치 치고 꽤 사색적인 물음이었으나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형편이 좋지는 않았다. 미유키가 고개를 으쓱. 샐쭉하니 웃는 표정은 좋아 보였다. 분명 떠올린 게 있지만 말해주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얄미운 새끼, 참고가 안 돼. 쿠라모치가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미유키는 추상적인 남의 마음 따위에 관심이 없었으니 되물음이 반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 야구를 왜 하냐고 묻는다면 쿠라모치는 입이 오므라들지도 모른다. 단순히 즐거워서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야구를 하다 보면 참담할 때도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지만 관두고 싶을 때마저 가끔 있다. 그런데도 야구인 것은 거기에 자신의 자리가 있을 것만 같은 희망 때문인가?……
필요하지 않은 변명을 하려 우물거리는데 맥없이 수업 종이 쳤다. 쿠라모치는 코끝을 긁적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교실이 아니라 부실이었는데 시라스의 가방에서 참고서가 나왔다. 쿠라모치가 공부하냐며 호들갑을 떨려는 찰나, 노리가 진지한 태도로 시라스에게 어느 과목인지 묻는 바람에 입이 도로 닫혔다. 군기가 잡혀 부실에선 잡담도 하지 않던 1학년 때나 공부라곤 신경도 못 쓰던 2학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문제집 출판사며 모의시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쿠라모치는 당최 참여할 수 없었다. 노리가 시라스의 조언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대화를 마무리하고서야 쿠라모치가 떠보는 투로 끼어들었다.
"중간고사 준비하는 거야? 뭐 벌써부터."
"그렇다기보다는, 수험생이잖아." 시라스가 한숨 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 그렇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낯선 민망함이 치솟아 들고 있던 이너에 얼굴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시라스 너, 성적 좀 나오지?"
"정작 주요 과목은 별로야."
그래도 주전 중에서는 성적 제일 좋잖아. 노리가 옆에서 맞장구쳤다. 성적에서 시라스보다 나은 건 나베나 키지마 정도가 전부다. 연습용 유니폼을 입은 채로 참고서에 시험 범위를 체크하던 시라스가 손을 멈추고 펜을 몇 번 돌리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난 너희랑은 다르니까 입시도 생각 중이어서. 그 말에 쿠라모치는 양말 끌어 올리던 손을 멈췄고 노리는 눈만 굴려 시라스를 쳐다봤다. 우리랑 다르다니? 의외의 말에 두 사람은 뭐라 말하길 머뭇거렸다. 그의 말대로 수험생이니 뭐든 자신의 입장을 정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쿠라모치는 갑자기 그인 선에 지레 놀라고 말았다. 다른 게 아니라 아무 미래도 상상해보지 않았을 뿐이다. 뒤늦게 쓴맛이 올라오는데 노리마저 털어놓듯 입을 열었다.
"글쎄….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문제겠지만, 나도 일단은 입시 준비할까 봐."
탄바 선배만큼 각오할 자신도 없고. 노리의 여상한 말투에 이번에는 시라스와 쿠라모치가 흘끔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말하며 매일 하듯이 글러브를 신경 써 손질하는 모습이 꽤 아이러니해 보였다. 미유키나 조노, 아소가 있었다면 또 소란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이 세 명이라면 무슨 말이 나와도 서로 대충 이해해주었다. 아마 노리로서도 여기에서나 발화까지 도달할 속내일 것이다. 분위기가 조금 차분해졌고 쿠라모치는 답지 않게 나긋이 말했다.
"계속해봐, 아깝잖아. 잘하는데…"
정말이지 남에게는 말하기 쉽다. 자신에게는 좀처럼 할 수 없는 말이다. 물론 듣는 입장에서도 자신의 본심과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다만 야구를 계속하라며 응원해주는 친구란 풋풋하니 기쁜 기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노리는 멋적게 웃어 보였다.
쿠라모치에게 야구란 즐거운 놀이의 연장선이었으니 재능 자체에 연연한 적도 없었다. 테츠 선배나 미유키, 후루야에게 열등감 따위 느끼지 않는 이유였다. 팀으로서 제대로 플레이를 맞춰주지 못해 답답한 기분에 자책하는 일은 더러 있어도 말이다. 타고난 재능이니 배신하지 않는 노력이니, 그런 건 잘 몰랐다. 그놈의 실력으로 치자면 마치 시험 성적으로 몇 등, 몇 퍼센트의 전산이 표로 뽑혀 나오듯 시라스와 노리, 그리고 조노와 미유키와 나베… 아니, 모두를 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나베나 조노보다는 잘 한다든지, 노리 만큼은 할 수 없겠다 라든지에 대해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그에게 야구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세계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못하거나 잘하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지? 누군가 팀의 일원인 자신에게 기대를 품고 거기에 부응하는 정도면 됐다. 즐거움은 타인이나 자신을 뛰어넘는 게 아니라 그런 마음의 화학반응에서 왔다.
문득 이제는 연락이 끊긴 치바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같은 마음으로 야구를 한 게 아니라는 건 새삼 충격이었다. 아주 어릴 때는 그 녀석들도 모두 웃으면서 경기했는데.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깨닫건대 즐거워지는데에도 재능이며 노력이라는 연료가 필요했다. 그것이 고갈되면 그만두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쿠라모치는 친구들이 어느 시점에서 야구를 하면서도 즐겁지 않게 되었을지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즐거운가에 대해 생각했다.
쿠라모치는 커튼 사이로 스며든 어스름한 아침 햇빛에 먼지가 빛나는 것을 한동안 구경했다. 생일이 주말인데도 당연하게 연습 시합이 잡혀있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평일 일과라면 좀 더 편한 심정으로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생일인 주말에 쉰다고 해서 중학생 때처럼 놀러 가거나 기숙사에 퍼져있을 것도 아니었다. 삼삼한 자율연습 대신에 시합이라도 즐길 수 있으면 다행이니 학교가 주는 선물인 셈 쳤다. 알람이 울리기 전이라는 걸 깨닫고는 조금 뒤척이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니 메시지가 여럿 쌓여있었다. 치바의 건달 형들, 아직 연락해오는 중학교 친구들, 세이도 야구부의 선후배와 연락처를 교환한 소수의 급우. 쿠라모치는 엇비슷한 메시지들을 하나씩 눌러서 알림을 지웠다. 그러다 유독 개성이 도드라지는 메시지 하나를 보고 킬킬거렸다. 선배들에게는 야구만 배우는 게 아니다. 태도며 정신도 잔뜩 배운다.
료스케 선배
[한창 바쁠 때지? 주말이니 연습 시합 있겠네.]
[선물인 줄 알고 즐겨라. 생일 축하한다.] 5월 17일(토), 00시 19분
기상 직후에는 야자타임이 끝난 사와무라와 또 한바탕, 실랑이라는 이름의 응징이 있었다. 좀스럽게 불만이 남은 사와무라는 아침을 먹고 워밍업을 할 때까지 쫑알거리며 여전히 맞먹으려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쿠메고와의 1군 연습 시합이 시작되고는, 쿠라모치가 막아낸 강한 타구에 제대로 '쿠라모치 선배!'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잊는 속도가 빠른 게 사와무라다웠다. 최근 들어 명백하게 호조를 보이는 사와무라에게 쿠라모치도 '나이스 볼', '나이스 피칭'하고 응답해주었다. 잘 던졌으니 말 좀 깐 것은 봐준다. 경기를 끝내며 경쾌한 타이 킥을 한 번 날렸다.
시합이 달가웠다고 해서 무리할 것도 없었다. 쿠라모치는 스트레칭까지 마친 후 곧바로 쉴 요량으로 씻고 나왔다. 오랜만에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켜보든가 할 셈이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려는데 두리번거리던 하루이치가 쿠라모치를 발견하고 부르며 다가왔다. 식당으로 가자는 말이 놀랍지도 않았다. 무슨 쓸데없는 짓이라도 했나보지. 하루이치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가자 대충 주전들이며 매니저들이 모여있었다. 딱히 깜짝 파티랄 것도 없어 어서 오라며 아우성을 치는 모습들이 뻔뻔했다. 테이블에 놓인 건 생일의 주인공이 한 조각 먹고 나면 나머지가 한 번씩 뜯어먹을 정도의 생크림 카스테라와 언제나의 자판기 주스, 그게 전부였다. 쿠라모치는 피식 웃었다.
"작년엔 이런 거 없었잖아? 3학년이라고 대접해주나."
"뭐, 주장 보조 노릇을 제법 했으니까 말이죠!" 사와무라가 먹을 준비 만만한 자세로 포크를 흔들며 말했다.
"인망 챙기더니 덕 좀 본다?" 조노가 말을 이었고 쿠라모치는 이렇게 시시한 덕도 다 있냐며 불평했다. 그래도 자꾸 웃음이 나와 생일상을 쳐다보고 있는데 사치코가 빨리 개시하라며 어깨를 치고 포크를 쥐여줬다. 쿠라모치는 잽싸게 포크로 크게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급한 대로 가까운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서 사 온 조악한 카스테라는 생크림이 입에서 겉돌았고 빵이 푸석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맛이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이런 불량한 맛도 좋아해 나름대로 특식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쿠라모치가 한 입 먹자마자 다들 바쁘게 손을 놀렸고 카스테라는 금세 너덜거려 원래의 촌스럽게 예쁜 형태는 사라지고 없었다. 동고동락했다고 할만한 인원이 모여있으니 어느새 축하는 뒷전으로, 시합이나 연습 이야기도 잦아들고 아무 상관 없는 잡담이나 한마디씩 하기 바빴다. 실없는 소리에 쿠라모치도 왁자하게 웃어댔다. 쿠라모치는 어른들이 없는 이 순간이 좋았다. 꾸짖을 사람이 없으니 맘껏 목청을 쓸 수 있다. 눈치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입에 빵가루나 묻힌 채로 한참을 떠드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액정 위에 뜬 [엄마] 짧은 글자에 쿠라모치는 포크를 내려놓고 식당을 나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며 하늘을 보자 그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어 퇴근할 시간임을 알았다.
[생일 축하해, 요이치.] 어, 고마워. 전화를 받자마자 본론부터 튀어나왔다. 수화기 너머가 소란했다. 내리는 역에서 집까지 걸으면 시간이 좀 된다. 쿠라모치가 초등학생, 중학생일 때도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심심하면 전화를 걸었다. 간만의 통화에 어색함도 잠시, 근황 이야기에 곧장 수다스러워지는 사람이었다. 연습경기를 이겼다는 말에 사실은 큰 관심도 없으면서 큰 소리로 칭찬해주었다. 통화가 길어질 모양이라 쿠라모치는 신발장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할아버지한텐 네가 전화해. 그 양반은 자꾸 너 맘 약해진다는 소리 하면서 괜히 고집부린다니까.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요즘 일찍 주무시니까 열 시 전에 전화 걸어."
"알았다구."
계속 받아주다가는 안 그래도 마른 입에서 단내가 날 것 같았다. 그런데도 바쁘다며 먼저 끊지 않는 이유는 있었다. 예전에 너 놀던 공원 이제 공사해서 없어져, 요즘 자꾸 소나기 내리던데 혹시 비 맞으면서 야구하니? 네 방 방치하는 중이니까 기숙사에서 돌아오면 알아서 청소해, 대답을 바라지 않는 자잘한 말들 속에서 쿠라모치는 어, 응, 알았어, 하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러다 계단을 오르느라 숨이 찬 듯 수다를 멈춘 엄마에게 대뜸 물었다.
"…엄마. 내가 대학 갔으면 좋겠어, 취업했으면 좋겠어?"
어?! 짧은 비명이 있었다. 의문스러운 듯 고민하는 소리가 이어지는 걸 보니 계단에서 자빠진 건 아니었다. 한참 동안 대답이 없으니 애가 타서 어중간하게 마른 머리카락만 쓸어넘겼다. 그러다 엄마가 약간 불만스러운 말투로 따져 들었다.
[너 무슨 일 있니? 생전 안 할 것 같던 소릴 하네. 이런 거 익숙하지 않으니까 관둬. …그보다 중학생 때는 야구선수가 꿈이라더니 포기한 거야? 어쩜 이렇게 기백이 없어. 누굴 닮은 거람?]
"아냐! 아니, 몰라. 그런 건…. 에이씨, 그래도 사정 따라서 뭐할지 정하든 해야 할 거 아냐. 기껏 물어봤더니." 쿠라모치가 받아쳤다. 어이가 없고 부끄러워 소리만 커졌다.
[너는 양아치니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냥 좋을 대로 하면 되잖아?]
양아치 졸업했다니까! 버럭, 지르는 목소리가 기숙사 안뜰에 울렸고 식당 안까지 들린 듯 잠시 소란해졌다. 쿠라모치 앞에서 숨겨왔던 사와무라의 성대모사 소리가 언뜻 들렸다. 생일인 주인공만 빼놓고 마저 즐기는 중인 게 분명했다. 엄마의 이런저런 걱정이며 잔소리를 흘리며 쿠라모치는 작게 혀를 찼다. 그러다 순간 코시엔, 한 단어가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얘, 듣고 있어? 여름에도 코시엔 가는 거냐구.]
"코시엔이 무슨 옆 동네 이름이게?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야."
[아―그래. 그래서?]
"당연히 가야지! 올여름은 바빠서 집에 못 갈지도 몰라."
쿠라모치가 다시 한번 내질렀다. 그의 투덜거림에 엄마가 예사로운 웃음으로 낄낄거리며 놀려댔다. 어차피 여름이 지나도 수험이잖아? 얼굴 볼 생각도 안 했는걸. 너 정신 똑바로 차려, 요이치!
"윽. 됐어, 끊어!"
쿠라모치는 짜증스레 화면을 눌러 통화를 종료했다. 마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눈에는 힘이 들어갔고 식은땀이 났다. 페이스에 휘말리게 하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는데 가족들 앞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피는 못 속인다고 해야 할지, 꼭 자신의 업그레이드된 버전 같은 엄마나 할아버지 때문에 항상 골려지는 쪽이었다. 그는 쪼그려 앉았던 다리를 털며 일어났다. 식당으로 들어가려다 머리만 복잡해질 게 뻔해서 돌아섰다. 생일을 축하하러 모였다곤 해도 어련히 저들끼리 떠들다 흩어질 테니까. 그래서 당초의 계획대로 기숙사 방을 향했다. 아사다도 같은 1학년들과 시간을 보내는지 5호실은 비어있었다. 쿠라모치는 책상에 앉았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켜지 않았다.
'중학생 때는 야구선수가 꿈이라더니 포기한 거야?'
그러고 보니 중학교 졸업문집에는 당당하게 '장래 희망 : 야구선수'라고 적었다. 그야 치바의 마츠이 카즈오가 되는 것 정도가 어설픈 상상력으로 떠올릴 수 있는 미래니까. 그 후에 곧바로 야구를 관둬도 좋다며 허세 부린 걸 보면 딱 그만큼의 가벼움이었다. 말할수록 가벼워지는 꿈도 있다. 고교야구를 2년 동안 헤쳐온 지금으로선 도무지 '장래 희망 : 야구선수'라고 쓸 수 없다. 야구를 계속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디 가서 말하기에는 굉장히 쑥스러운 실력이란 것도 알게 됐고 어설프게 들리기도 싫었다. 이를테면 코시엔같은 거다. 한순간이라도 부정당하면 꿈을 손에서 놓쳐버릴 것 같은 환경에 있어서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아무도 섣불리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조금만 더 야구의 시간을 유예하려는 듯 뒤로 미루어간다. 일단 당장은 여름까지 그 시간을 유예했다.
책상에 종이 한 장을 펼쳐두고 펜으로 박자를 맞추며 아침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좋아하는 앨범의 수록곡이기는 한데 타이틀은 아니어서 여전히 제목은 외우지 못하는, 그런 애매한 노래였다. 그렇지만 뒤섞인 재생목록에서 흘러나오면 넘기지 않고 꼭 끝까지 들었다. 매번 제목을 기억해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사는 전부 외웠다. 천천히 허리를 숙여서 펼쳐둔 종이를 응시했다.
그리고 무언가 끄적였다. 글자를 써 내려갈 때는 굼뜬 손을 머뭇거렸으면서 모두 적은 뒤에는 단호하게 펜을 내려놓는다. 몇 글자 없는데 무언가 잘못 적히기라도 했는지 팔짱을 끼고 한참을 가까이서, 멀리서, 비스듬히 살펴보았다. 전속력으로 달리지 않아도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좋을 대로 하라니 정말 대책 없는 말이다. 그렇지만 대책이란 건 여태 가져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드디어 결심이 섰다. 쿠라모치 요이치는 진로희망조사서를 이미 자국이 난 대로 다시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이 즉흥적인 결정이 자신을 어딘가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면서.
여름이 끝날 때까지는.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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