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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램덩크 2차 창작
- 변덕규X윤대협
- 카나가와의 윤대협 설정(호칭...)
“대학에는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테니 건방 떨지 말고, 늦잠 자지 말고, 다치지 말고. 밥때 놓치지 말고, 농구 열심히 해라.”
윤대협에게라면 ‘농구 재밌게 해라’가 좀 더 어울리겠지만 열심히 하라고 조언한 것은 변덕규다웠다. 4월을 앞둔 초봄의 평일 오전, 도쿄로 향하는 기차역 승강장에는 사람이 적었다.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이 마주 보고 선 모습이 단순히 선배의 배웅이라기에는 제법 쓸쓸하고 애틋한 풍경이었다. 네, 대협은 짧게 대답하며 잠시 그의 손을 잡았다. 외로워 보이는 얼굴이 아니어야 할 텐데. 누구 것인지 모를 생각이 스쳤다.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음성과 음악이 울려 퍼지고 대협이 간소한 짐가방을 들어 맸다. 다른 짐은 이미 도쿄에 택배로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마저도 많지는 않았다. 출입구 계단에 오르자 이내 열차가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덕규는 촌스럽게 열차를 따라 달리거나 하지 않았다. 도쿄에서 잠시 내려왔던 신선이 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때, 출장에 지각한 샐러리맨 한 명이 속도가 붙기 시작한 열차의 출입구로 뛰어들었다. 뭔가 구르는 소리가 났고 잠시 소란이 일었다. 사고가 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역무원이 뛰어갔고 열차는 잠시 속도를 늦추었다. 소란을 목격한 덕규가 다시 대협이 있던 곳에서 시선을 헤맬 때, 마찬가지로 무슨 일인지 내다보던 대협이 그대로 가방을 던지고 승강장으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덕규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열차는 속력을 내어 가야 할 길을 떠났다.
덕규는 골이 아픈 듯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음 열차는 한 시간 뒤였다.
“하하하.” 대협은 떨어졌던 가방을 털며 크게 웃었다.
“너, 이 자식……”
“배고프지 않아요? 도시락이라도 사 먹죠.”
남아도는 시간을 무엇으로 때우겠냐는 듯 그가 미소 지었다.
하마터면 잔소리로 한 시간을 때울 뻔했다. 모처럼 늦잠을 자지 않고 제시간에 열차를 탈 수 있었는데 역까지 그를 데리러 올 어머니가 걱정을 안고 기다리게 됐다는 이유다. 도시락 가게 앞에서도 고로케가 든 걸 먹고 싶다는 대협과 생선과 고기가 올라간 걸 먹거나 하다못해 닭밥으로 해야 한다며 우기는 덕규의 유치한 대화가 이어졌다. 대협이 멋대로 저지른 행동에 덕규가 격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곁들일 음료로 포카리를 고를 선택권도 잃고 얌전히 따뜻한 녹차를 받아 들었다.
“맛있네요. 아침으로는 조금 배부를 것 같지만.”
대협이 연어소금구이를 입에 가득 넣고 웅얼거렸다.
“시끄럽다. 이 정도는 간에 기별도 안 갈 녀석이.”
끝없이 잔소리를 하면서도 나름의 배려인지 덕규는 도시락과 음료를 자기 돈으로 사주었다. 어차피 대협도 두 번째 기차표를 끊으면서야 뒤늦게 지갑 사정을 떠올렸을 것이다.
매표소 앞에 작게 마련된 광장 벤치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덕규가 도시락의 미묘한 맛과 온도를 신경 쓰고 있는 동안 대협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아아. 이러니까 자연스레 응석받이가 된다.
카나가와에 처음 왔을 때, 대협은 도쿄의 부모님과 떨어져 작은 방을 빌린 하숙생이었다. 날 때부터 태평한 대협이었으나 막 중학교를 졸업하고 타지에서 본격적으로 운동부 활동을 시작하니 조금은 환경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유 감독의 루틴은 너무 빠르고 철저했으며 선배들은 성실하고 열정적이었다. 짧지만 살아오는 동안 사람들의 정수리를 보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는데, 자기보다 한참이나 키가 큰 한 학년 위의 선배를 보게 되면 당연히 놀라고 만다. 코트에서 마주하기만 해도 움츠러들게 만드는 몸은 아마도 천부적인 재능일 것이다. 우직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그 선배의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봄이 지나가기 전에 연습 게임 중 처음으로 그의 골 밑 수비를 뚫었을 때, 그가 보인 반응은 의외였다. 덕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서운가 싶던 얼굴이 갑자기 친근해졌다. 웃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점프가 높네. 키에 비해 몸이 가볍군.”
다른 색의 조끼를 입고 있는데도 덕규는 대협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도자가 아니라 함께 뛰는 동료에게서 받는 칭찬은 영양분이 다르다.
다음날은 멤버를 바꿔서 연습 게임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변덕규 선배랑 팀을 짜보고 싶다. 중학생 때는 센터라도 나랑 덩치가 비슷했는데. 나는 아직 수비가 약하니까 배울 점도 많고 밸런스가 좋을 거야. 대협은 카나가와에 온 뒤 처음으로 잠을 설치고 늦잠을 잤다. 기대감이라는 것은 태평함의 바다에 돌을 던지는 소악마다.
신입생 대협의 빠른 선전에 질투를 하는 선배도, 달가워하는 선배도 있었다. 덕규는 어느 쪽이라기보다는 대협을 신기하게 여기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의 눈에 대협은 몸만 컸지 아직 한참 어려 보이는데도 경험에 기반한 플레이가 능숙했고, 조언이나 칭찬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평가를 들으면 신경이 쓰이는 자신에 비해 팀에 섞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나이보다 성숙하다고 할까. 자라는 동안 내내 천재라는 말을 들어왔을 녀석 치고는 겸손했다.
두 사람이 팀을 짠 두 번째 연습 게임은 이겼다. 탈의실을 향하면서 의욕적인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사실, 덕규 형이랑 팀 짜는 거 기대했어요.”
대협의 호칭은 ‘선배’에서 조금 친밀하게 바뀌어 있었다.
“기대했다고?”
“네. 기대한 대로 시원하게 이겼네요.”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묘하게 수줍어 보였다. 덕규는 덩달아 쑥스러워졌다. 도쿄에서 신입생이 온다고 들었을 때 막연하게 건방진 독불장군 에이스를 떠올린 것이 무색했다. 늘 빙긋 웃고 있어서 속내는 잘 알 수 없어도, 그는 제대로 팀워크에 대해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었다. 연습 게임만 해도 자신이 몇 점이나 따냈는지는 벌써 잊은 것처럼 보였다. 이번 해는 큰 변화가 생길 것 같다고, 덕규는 대협을 보며 생각했다.
그 뒤로 자다가 늦거나 연습 메뉴를 까먹는 맹한 행동을 보며 의외로 허술한 바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어쨌거나 덕규에게는 그때부터 쭉 귀감이 되는 후배였다. 건방 떨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모습이, 팀에 애착을 가진 모습이 조금은 귀엽기도 했다.
그러니 계절이 다섯 번쯤 바뀌고 덕규의 3학년 여름이 끝나며 생긴 변화는 놀라운 일이었다. 전국 대회 예선 탈락의 상처가 아물어 갈 즈음, 대협이 아픔을 잊을 만한 폭탄 발언을 했다. 농구부 연습을 마친 대협과 진로상담이 끝난 덕규가 우연히 마주쳐 오랜만에 함께 귀가하던 참이었다. 바닷바람이 아직 습하고 미지근한데도 일몰은 이미 빨라져 수평선을 주홍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덕규 형, 좋아해요.”
덕규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대협을 돌아보았다. 얼빠진 농담일 줄 알았는데 진지한 얼굴이었다. 목소리도 조금 떨린 것 같았다. 의미를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대협은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멈춰 선 덕규의 옆으로 걸었다.
“그리고, 입시 공부 할 거 아니면 윈터컵도 나가자고 감독님이 슬쩍 한번 떠보래요.”
경악스러운 말을 한 가지 더 들으며 덕규도 대협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그걸 나한테 그대로 말하면 안 되지.”
덕규가 반사적으로 핀잔을 주었다. 대협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화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태연히 눈을 마주쳐 오는 얼굴을 보아하니 덕규의 복귀를 확신하고 있었다. 덕규는 좀 전의 가슴 떨리는 고백도 잊은 채 이를 갈았다. 웬수 같은 녀석.
“생각해 보마.”
“어느 건을요?”
“……둘 다.”
사춘기 남학생들이 꽁꽁 뭉쳐있는 운동부에서 오래 지내면 남자끼리 이성 보듯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좋든 싫든 전해 듣게 된다. 알고는 있지만, 한 번도 자신이 주인공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덕규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꺼내던 사내 녀석들처럼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니라 가슴이 좋은 느낌으로 울렁이는 것도 이상했다. 고백을 한 대협보다 자신이 더 떨고 있는 건 아닌지 머쓱해졌다.
그 다음 주부터 덕규는 다시 농구부 연습에 참여했다. 담임이나 부모님과도 이야기가 잘 된 모양인지 부원들 앞에서 유 감독에게 진중한 감사 인사까지 전했다. 대협은 물론 기쁘고 즐거웠으나, 한편으로는 나머지 하나의 결정은 내리지 못 했는지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 뒤로도 덕규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대협은 이미 마음을 접어두고 평정을 되찾았다. 농구를 하면 바쁘게 지낼 수 있고, 남는 시간에는 먹고 자고 여느 때와 같이 심신을 평화롭게 두면 된다. 가끔 끓어오르듯이 뜨거워지는 심장은 모르는 척했다.
기대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온 것은 윈터컵 출전이 걸린 현 대회의 마지막 경기에서였다. 대협의 표정을 읽은 덕규가 곧장 스크린을 걸었다. 깔끔한 패스를 넘겨받은 태산이 덩크로 마지막 점수를 장식했다. 전국 대회로 향하는 문을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열게 된 덕규는 그날도 울었다. 태산과 영수도 따라 울었다. 덕규가 으스러질 듯 끌어안았을 때 대협은 자신의 심장 박동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땀에 젖은 관자놀이에 덕규의 코가 스치고 뺨에 숨이 닿았다. 대협은 땀을 닦는 척 자신의 유니폼을 끌어올려 얼굴을 묻었다.
전철에서 내린 후, 따라오라는 조용한 부탁에 해변으로 내려온 대협은 덕규의 몇 걸음 뒤에서 모래사장을 걷고 있었다. 익숙해져 버린 파도 소리와 짠 내음은 경기의 여운을 차분하게 식혀주었다. 가을바람이 여전히 뜨겁게 달궈져 있는 목덜미와 팔뚝, 허벅지로 파고들었다. 덕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좋다.”
“뭐가요?”
“네가.”
“…….”
대협은 걸음을 멈추었다. 웃는 것이 버릇이라도 지금만큼은 웃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미소가 비집고 새어 나왔다. 대협은 스니커즈를 벗고 맨발로 모래 위를 걷기 시작했다. 자기도 모르게 투덜거림이 튀어나왔다.
“이미 늦었어요. 그리고 타이밍이 나빠요. 내가 농구를 잘하니까 좋아하는 것 같잖아요.”
“뭐, 솔직히 그런 것도 있지. 안 되는 거냐?”
“아뇨, 봐드릴게요.”
“대답이 늦어진 건, 뭐라도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싶어서야. 딱히 네가 싫다거나, 망설인 게 아니라…….“
장황한 변명에 대협이 소리 없이 웃는 것을 보고 덕규도 따라 웃었다. 대협은 발이 시원한 모래 사이에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늦추었다.
일부러 증명하지 않아도 덕규 형은 언제나 멋졌어요. 진지하고 성실하고 호승심이 가득해서요. 멋없을 때도 좋았어요. 서툴러도 다정하고 솔직한 게 느껴져서요. 바보 같은 고백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인 데서도 알 수 있어요.
그러나 대협은 말을 삼키는 데에 재능이 있었다. 두 사람은 더는 말하지 않고 오래도록 해변을 산책했다.
흥분에 휩싸인 윈터컵을 치르고, 덕규가 존경과 격려를 받으며 졸업하고, 능남 농구부가 또 한 번의 뜨거운 여름 대회를 치렀으며, 대협이 농구를 계속할 대학이 정해졌다. 한 해 동안 덕규는 대협의 경기를 챙겨보았고, 대협은 덕규네 가게에 드나들었다. 여름이 지나자 시간은 더욱 정신없이 흘러갔다. 두 사람에게 특별히 로맨틱한 이벤트는 없었으나 다정하고 즐거운 순간들은 한결같이 있었다. 이를테면 우연히 첫눈이 오는 밤에 키스한다던가.
대협의 타향살이도 이제 곧 끝나 대학이 있는 도쿄로 갈 예정이니, 연말부터 시작되는 연휴에는 잠시 귀향해 자기 방을 좀 청소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은 시간이 왜 그리도 아쉬웠는지. 졸업하기 전에 카나가와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말에 부모님은 냉큼 둘만의 온천 여행을 계획했다. 그리고 외지에서 혼자 설을 지낸다는 대협을 측은하게 여긴 덕규의 부모님은 아들의 귀여운 후배를 집으로 초대했다.
덕분에 대협은 평균 체격이 큰 세 가족과 친척 몇 명 사이에 꽉 끼어서 정신없이 먹고 마시며 즐겁게 보냈다. 시끌벅적한 한 해의 마지막과 정월 초하루를 보낸 뒤에는 넷이 함께 코타츠에 늘어져 TV에서 중계되는 하코네 역전 마라톤을 감상하기까지 했다.
연말연시 연휴를 꼬박 신세 진 대협은 연휴의 마지막 날 낮에 홀연히 나가더니 고급 과자 세트를 사 와서 보답했다. 가마쿠라 전통의 예쁘장한 반달 모양 전병이었다. 학생이 무슨 선물이냐며 덕규의 부모님이 극구 사양했지만, 대협은 졸업을 앞둔 마당에 용돈 쓸 곳도 별로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부모님은 선물의 내용물보다는 어리버리한 듯싶으면서도 서글서글하니 붙임성 있는 대협의 행동이 더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농구부에서도 저것의 반만 야무지게 굴었다면 감독님이 챙겨 먹는 위장약도 반은 줄었을 거다. 진실을 아는 덕규는 몰래 혀를 찼다. 대협은 그런 덕규를 마주 보며 뻔뻔스레 빙긋 웃었다.
그러나 덕규는 대협이 혼자 있을 때를 훨씬 더 좋아하는 것도 알았다. 한 해가 저물건 새로 떠오르건, 하숙집에서 혼자 늦잠을 자고 평범한 식사를 한 뒤 스트레칭과 산책 정도로 나른함을 떨치는 담백한 설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덕규는 해가 기울어 땅 그림자가 허리에 걸친 저녁 무렵, 대협을 데려다주며 위로했다.
“고생했다.”
“저야 종일 놀기만 했는데요?” 대협은 장난스레 웃으며 답했다.
“운동할 때 빼면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는 것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아니에요. 정말 즐거웠어요.”
“흐음.” 덕규는 애매하게 웃었다.
“덕규 형네 부모님께 새해 인사 드리고, 떠들썩하게 놀고, 맛있는 것 먹고. 전부 좋았어요. 내년에도 이렇게 지낼 수 있다면 명절이란 게 특별해질 텐데.”
대협이 웬일로 길게 말했다. 솔직함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덕규는 의아한 것이다. 농구 말고는 별 관심도 열정도 없는 듯한 녀석이, 왜 자신을 좋아해서 사귀기까지 하고, 요란한 명절 따위에 행복을 느끼게 된 걸까.
나도 네가 있어서 즐거웠다. 덕규는 그렇게 솔직할 순 없었으므로 조금 에둘러 말했다.
“다음에 또 놀러 와라.”
대협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뺨에 노을이 물들어 그 빛이 아름다웠다.
대협이 떠나는 것을 외면하며 잊고 있자니 졸업식도 성큼 다가왔다. 졸업식이 끝나면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그가 대학이 있는 도쿄로 가버린다. 자신이 졸업장을 받았던 풍경을 덕규는 다시 한번 찾아갔다. 기특하고 고마운 후배들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제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닌 연인의 고교 마지막 추억을 장식하기 위해서.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가 짧게 덕담 정도만 건네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눈에 띄는지 농구부 후배들이 먼저 달려와 덕규에게 말을 걸었다. 사진까지 몇 번이나 함께 찍어주었다. 상기된 뺨을 하고 다음에 친목 경기나 모임을 하자는 둥 정 많은 소리들을 떠들어댔다. 몇 명을 빼면 앞으로도 이 바다 마을에 머무를 것이다. 볼 수 있는 날은 많았다.
대협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는 덕규에게 후배들은 그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으며 졸업생 대표 연설도 듣지 않았다고 일러바쳤다. 덕규는 축하한다는 말을 몇 번 더 뱉으며 서둘러 빠져나왔다. 교정 뒤의 아무 벤치에서 잠들어 있겠지. 벚꽃이 이르게 피었지만 아직 밖에서 낮잠을 자도 괜찮을 날씨는 아니다.
의외로 대협은 벤치에 누워있지 않고 벚나무 그늘에 걸터앉아 있었다. 우수에 젖은 눈빛에도 덕규는 그가 그저 잠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중임을 알았다.
“졸업식은 벌써 끝났다. 사진이라도 몇 장 남기려거든 빨리 돌아가야 할 거야.”
덕규가 다가오며 말했다.
“아직 나른해서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대협은 옆에 나란히 앉은 덕규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덕규 형, 그렇게 하고 사진 찍었어요?”
“뭐가 어때서?”
“이것 봐요.”
그가 손을 뻗더니 덕규의 옆머리에서 벚꽃잎을 한 장 떼어냈다. 이런. 덕규가 민망해했다. 대협은 웃음을 멈추고 꽃잎을 손에 쥐었다. 잠시 조용히 기대어 있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주 보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대협은 거친 뺨에 한 번 더 입술을 붙였다. 그리고 아쉬운 듯 꽃잎을 놓아주더니 자신의 머리도 한 번 털었다.
사귄다고 해도 두 사람이 해본 것은 입맞춤 정도가 전부였다. 경기 전후로 탈의실에서 벗은 몸 봤던 일도 카운트할 수 있다면 좀 더 체면이 설까. 덕규는 남자끼리 뭘 더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대협은 조급하게 굴어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 그대로도 괜찮았던 것은 눈빛과 표정만으로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대협이 용기를 내어 정적을 깼다.
“덕규 형, 저도 이제 어른이네요.”
“그렇지.”
“본가가 대학이랑은 거리가 좀 있는데, 그래도 도쿄라고 기숙사는 떨어졌어요. 대학교 앞에서 자취할 거예요. 카나가와에서 지낼 때랑 비슷하겠죠.”
“그렇군.”
“다음에 와주세요.”
“……그래.”
그 말이 어떤 마음을 머금었는지 덕규도 잘 알았다. 단순히 맛있는 반찬을 가지고 도쿄 구경을 오라는 말은 아니다. 아마도 대협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릴 것이다. 넌지시 알리는 말에 덕규 또한 침을 넘기며 제대로 각오를 다졌다.
물론 직접 만든 반찬을 들고 찾아갈 작정이었다. 도쿄에 가자마자 그의 냉장고를 채워주고, 자고 일어나면 아침을 만들어 주고, 레몬 절임을 새지 않도록 운동 가방 안에 챙겨두겠지. 대협의 연습을 지켜보다가 함께 귀가하며 도쿄의 혼잡한 거리를 거닐 것이다. 덕규는 달마다 바뀌는 직원 휴일을 계산했다. 새 학기에 치여 미뤄뒀을 짐 정리를 돕고, 겨울옷은 정리한 뒤 여름옷을 꺼내고, 뜨거운 잔소리로 원정 경기의 준비를 함께할 날들이었다. 그러니 잠시 떨어지게 되어도 괜찮았다.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시락은 이미 전부 먹었고, 남은 녹차는 입에 털어 넣었다. 부모님께 늦는다고 공중전화로 연락도 했다. 다음 열차까지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대협은 빈 캔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고 자신의 짐가방을 대신 챙겨 승강장을 향하는 덕규를 재빨리 따라잡았다.
“그렇게 서두르지 말아요.”
“또 열차를 놓치면 네 녀석을 가만두지 않을 거다.”
정말 성실한 사람이라니까. 덕규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추니 승강장까지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대협이 가방을 도로 넘겨받는 동안 기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이번에는 바로 타라. 덕규가 대협의 어깨를 떠밀었다.
“잠시만요.”
“뭐야?”
“아까 그거, 또 말해주세요.”
덕규는 부탁을 듣자마자 머리에서 김을 뿜었다. 번거로운 일을 시킨다. 뭐라고 말했는지 자세히 기억도 안 난다. 잔소리를 하려다가 시간이 아까워서 참고 말았다. 얼른요. 주문을 외지 않으면 기차가 출발하지 않는 것처럼, 대협이 보챘다. 덕규는 대충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학 생활 잘하고, 잠은 제때 잘 자고. 아픈 데 있으면 바로바로 말하고, 밥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농구 재밌게 해라.”
대협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짐가방을 고쳐 멨다. 그리고 덕규가 어깨를 잡았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품에 안겨있었다.
“전화 많이 하고. 다음에 보자.”
대협은 대답 없이 눈을 감고 가만히 온기를 느끼며 그 목소리를 깊이 새겼다. 쑥스러워진 덕규가 어깨를 밀어 도로 떼어낼 때까지. 역시 기차에서 뛰어내리길 잘했다.
“네, 덕규 형. 저도 좋아해요.”
재작년에 비하면 훨씬 능숙해진 고백에 덕규는 골 밑이 뚫려 점수를 내어주고 말았다. 대협은 졸업을 했다고 부쩍 어른스러운 태가 났다. 대답도 못 하고 얼굴을 붉힌 채 반대편 빈 승강장을 쳐다보고 있자 대협이 큰 소리로 웃으며 덕규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팔로 흘러내린 짐가방을 번쩍 들었다. 열차 시간까지 미룬 주제에 제법 쿨하게 돌아서서 갈게요, 외치는 모습이 얄미웠다. 열차에 오르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한시바삐 여행길에 올라 자리를 채우는 승객들은 커다란 두 남자가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더니 헤어지는 장면에 일절 관심도 없었다. 덕규는 혼자 남은 승강장에 한참 동안 우뚝 서 있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은 연인의 옆얼굴을 실은 열차가 보이지 않는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머릿속에선 좋아하는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파도처럼 밀려왔다 흩어졌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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